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87> 위대한 업적… 그 이면에 이름없는 사람들의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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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87> 위대한 업적… 그 이면에 이름없는 사람들의 희생
뉴욕, 뉴욕, 뉴욕-브루클린 다리에서 보는 토목공학자 가족의 열정 그리고 희생의 빛남
  • 입력 : 2022. 10.20(목) 15:14
  • 편집에디터

브루클린 다리

1866년 뉴욕에 유독 혹독한 추위가 닥쳐왔다. 이스트 리버가 얼어붙을 정도였다. 당시 뉴욕과 브루클린은 독립적인 도시였다. 유일하게 페리가 두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운송) 수단이었는데 강이 얼어버려서 운항이 중단되었다. 다리 건설이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뉴욕 동쪽의 이스트 리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구상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독일 이민 출신 토목공학자인 존 뢰블링이었다. 뢰블링은 강 속에 케이슨을 이용하여 거대한 석재 주탑을 세우고 강철 케이블을 사용한 현수교를 상상하고 있었다. 새로운 강철 제련법을 이용할 참이었다. 마침내 뢰블링은 이러한 모든 신기술을 이용하여 다리 공사를 착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는 순간, 그의 가족에게 저주가 찾아왔다.

브루클린 다리

저주의 시작은 1869년 6월, 설계를 마친 뢰블링에게 먼저 왔다. 브루클린 페리 선착장에서 첫 측량 작업을 감독하고 있을 때였다. 페리선이 도착해서 그 앞으로 왔다. 그가 뒤로 물러섰으나 그의 발은 미처 선착장 말뚝에서 빼지 못했다. 페리선이 선착장 말뚝을 들이받으면서 그의 발까지 뭉개버렸다. 뢰블링은 자신의 발가락이 뭉개졌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일을 강행했다. 결국 얼마가지 못해서 쓰러지고 말았다. 발가락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지만 파상풍이 진행되어 사고가 난 지 불과 3주 만에 사망했다.

존 뢰블링은 죽었지만 다리 프로젝트는 여전히 건재했다. 존 뢰블링의 원대한 꿈을 그의 아들이 이어받았다. 아들 워싱턴 또한 유능한 토목기술자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강한 성격으로 일을 카리스마 있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면 그는 조용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조언대로 유럽에서 교각기초 케이슨에 대해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 전쟁 때 중령으로 참전했던 경험 많은 지도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아버지가 죽은 지 3년 만에 케이슨병에 걸리고 만다. 케이슨병은 오늘날 말하는 잠수병이다. 그 당시에는 원인조차 알지 몰랐다. 케이슨에 들어가서 일을 해서 얻는 병이라고 해서 케이슨병이라고 했을 뿐이다.

케이슨은 수중이나 연약지반에 큰 구조물을 세울 경우 철근콘크리트 등으로 통 또는 케이슨(caisson, 상자) 등의 구조물을 만들어 땅 속에 묻어 기초로 하는 공법이다. 워싱턴은 케이슨 공법을 다리 건설을 하는 데에 활용하였다. 바닥이 없는 거대한 철제 박스를 강물에 띄워 교각 위치로 옮긴 후 돌을 쌓아 무겁게 해서 가라 앉혔다. 강바닥에 안치된 박스 속으로 증기기관의 높은 기압의 공기를 불어넣고 기압 차로 물을 밖으로 배출시켰다. 인부들이 출입구를 통해 박스 안으로 내려가 강바닥의 진흙을 파내 케이슨을 강바닥 깊이 안정되게 설치했던 것이다. 축축하고 덥고 냄새 고약한 이 폐쇄된 공간에서의 작업을 워싱턴 또한 인부들과 함께 작업하다가 결국은 케이슨병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1870년, 그의 나이 35세 되던 해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 뒤로 평생 침대생활을 해야 했다.

브루클린 다리

하지만 다리 프로젝트는 중단되지 않았다. 이는 워싱턴의 병간호를 맡은 부인의 힘이 컸다. 워싱턴이 병상에서 도면을 검토한 후 과업을 지시하면 그의 아내인 에밀리가 현장기술자들에게 전달하는 식이었다. 에밀리는 워싱턴의 훌륭한 동료이면서 핵심적인 조수였다. 책임기술자의 감독관이었으며 연락관, 심지어는 대변인 역할까지 했다. 실질적인 책임자였지만 당시 여성이 사회적으로 어떤 일을 나서서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워싱턴이 병상에 누운 지 13년이 지난, 1883년 5월 24일 다리가 개통되었다. 뉴욕과 브루클린이 하나가 된 것이다. 축하 연설과 공연이 하루 종일 계속되는 동안 워싱턴은 그의 방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초로 강철선을 사용한 현수교로서 당시 세상에서 가장 긴 경간을 자랑했다. 중앙 경간이 무려 486미터였는데 이 기록은 향후 20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체스터 아서 대통령까지 참석할 정도로 개통식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다리의 아름다움은 시간이 갈수록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개통 당시의 다리 명칭은 '뉴욕-블루클린 다리'였으나 1915년에 공식 명칭이 '브루클린 다리'로 변경되었다.

브루클린 다리

이 가을 나는 브루클린 다리를 소급한다. 브루클린 다리는 가을 햇살을 닮았다. 연구실 창문 너머 찬란한 오후의 가을 햇살이 들어올 때나, 아침에 주차를 하고 건물로 막 들어설 때 발밑으로 나뒹구는 단풍 든 낙엽을 볼 때면 어김없이 그 다리가 떠오른다. 그곳 벤치에 앉아 책을 읽다가 잠깐 고개를 들었을 때의 눈앞에 펼쳐지던 스카이라인, 해가 질 때면 단풍 든 낙엽보다 더 고운 빛깔로 주탑과 그 주탑과 연결된 부챗살 모양의 케이블 선을 따라 바닥으로 흘러내리면서 저물어갔던 햇살들이 고스란히 현실 속 내게 다가온다. 다리 1층에서 올라오던 자동차소리도 뉴요커들의 바쁜 걸음과 자전거 바퀴 굴러가는 소리도, 여행객들의 행복한 수다소리도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 하다. 다리가 개통된 지 140여 년. 그 세월의 흔적 속에 켜켜이 숨겨져 있는 핏빛의 아름다움 또한 놓칠 수가 없다. 다리를 건설하는 동안 뢰블링 가족에게 찾아온 불행 못지않게 공사 중 이름 하나 남기지 않고 낙엽처럼 생명을 떨구고 간 인부들(대다수가 중국인 출신이었다). 그들의 넋이 해가 질 무렵이면 황금빛으로 변해 다리 위에서 탭댄스를 추면서 그들의 희생을 그들끼리 위로하는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업적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수고로움 들에도 귀를 기울여달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 차노휘: 소설가, 도보여행가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