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梨花雨 흩날릴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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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梨花雨 흩날릴 제
최도철 미디어국장
  • 입력 : 2023. 04.10(월) 17:06
최도철 국장
자연의 운행은 엄연하다. 4월 들어 봄비 내리고 따사로운 햇살 비치자 이곳 저곳서 봄꽃 축제가 한창이다.

지난 주말 나주에서도 작은 꽃잔치가 열렸다. 온 들판을 하얗게 덮은 배꽃에 달빛 흐뭇한 봄밤 서정을 나직하게 담을 수 있는 ‘나주 배꽃축제’이다.

달빛 숨소리 속에 떨어지는 배꽃의 낙화는 황홀하면서도 처연해, 마치 안거 마치고 운수(雲水) 떠나는 탁발승의 뒷모습을 닮았다.

배꽃을 소재로 봄날의 서정을 노래한 문인들이 많다. 목은 이색은 “한 그루 배나무 꽃 핀 아래/ 실바람 부니 경치 절로 번화해라/ 공중에 날릴 땐 떨어지는 눈 같고/ 땅에 나부낄 땐 치닫는 물결 같네” 라고 했고, 백화헌 이조년은 배꽃 핀 달밤에 소쩍새 우는 소리 들으며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일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는 시조를 남겼다.

개중에 백미는 부안의 명원(名媛) 이매창이 정인(情人)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쓴 ‘이화우 흩날릴제’이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매창의 나이 방년 21세. 부안에 내려온 유희경과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2년 뒤 정인이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짧은 만남, 긴 이별이 시작된다. 유희경은 매창의 가슴에 깊은 정을 남겼고 그 정한은 시심으로 피어나 절창을 짓게한 것이다.

매창은 부안현의 관기였다. 1573년에 태어나 37세의 나이로 숨지기까지 수백편의 시문을 지었다. 그 가운데, 한시 58수(1668년 개암사 간행)와 시조 ‘이화우’ 1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명성을 얻으면서,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 인조반정 공신 이귀 등과 같은 문사들과 교유했다.

마음을 홀리는 매창의 시 몇 편을 소개한다. “봄바람에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 버들과 매화가 다투어 피네/ 이 좋은 날 차마 못할 짓은/ 술잔을 앞에 두고 임과 이별하는 일이라네”

“푸르름이 캄캄하고 안개가 버들을 에워싸서/ 붉음이 혼미하구나, 안개가 꽃을 짓눌러서/ 산의 노래 멀리 퍼지는데/ 뱃전의 피리소리 석양에 기울어지네.”

따사로운 봄햇살 아래 배꽃 지는 풍경보며 연정에 겨운 매창의 시를 읊조리는 것도, 더없이 소란한 세상사를 잊는 한 방법이지 않을까. 발길 닿는다면 부안을 찾아 매창의 무덤이라도 들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