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작가 에세이·강남호>청년들의 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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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작가 에세이·강남호>청년들의 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강남호 문학박사·광주문인협회 부회장
  • 입력 : 2023. 11.23(목) 12:57
강남호 문학박사
소크라테스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무지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 것인데 근원적으로 무지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는 인간은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특히 청년 세대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직업에 있어 두려움이 많다. 그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긍정보다 부정이 앞선다. 그렇다면 산업화 세대인 기성세대는 청년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보통은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 청년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그래서 문명의 파도에서 세대 간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분명히 세대 간의 차이는 존재 한다. 분명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선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20세기적 공동체적 삶, 무조건 개인은 단체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인식의 배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청년들의 이기적 개인주의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관계 정리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특히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부모와 자식, 기성세대와 청년들은 빠르게 단절 아닌 단절이 되었다. 필자는 80년대 청년들의 사자 후 소리가 그립다. 그 시대의 청년들에 비해 요즘 청년들은 철저히 자기방어를 하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에 필자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파고들 틈이 없다. 지금의 청년들도 80년대 청년들과 다름이 없는데 왜 지금의 청년들은 자신들의 공적과 재능을 SNS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청년들의 화음과 멜로디를 80년대 통기타에 맞춰 노래할 수 없는지, 전자음악(EDM)에 기성세대의 애환을 그려 넣을 수는 없는 것인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늘 자신들밖에 모른다고 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전적으로 청년들 탓을 하면 안 된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생물학적 유전자(gene)를 부정하는 요즘 청년들의 공통점은 집단 선택설을 부정하고 대안 가설로 자연선택의 진정한 단위는 개인 유전자라고 부르짖는다. 이 또한 불행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요즘 청년들 DNA와 80년대 청년들의 DNA가 다르다는 인식에 동의할 수 없다. 잘못된 지식과 함께 잘못된 모성애, 공격성, 공동체적 협력의 상실, 상호 간의 경쟁, 세대 간의 이율배반적인 경쟁 등 이런 양상으로 인해 이기적 유전자의 형태가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팽배하게 나타나 있다 하겠다. 하지만 요즘 청년들의 이기적 행동이 공동체 사회에서 개인주의로 형태로 바뀌는 경향이 크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모가 자식의 잘못된 행동을 참견했을 때 불쾌한 반응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을 한두 번은 있었을 것이다. 참견에 따른 불쾌한 반응에서 분노는 현명하다 할 수는 없겠지만 못 볼 꼴을 본 듯한 심정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 부모는 고개를 돌리는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 무조건 눈감아 주는 것은 답이 아니다. 자식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충분한 대화가 필요하다.

그렇다. 청년의 청각은 무차별적인 감각에 있다. 어른들이 가르치려는 소리가 사랑이라기보다는 공격적인 형태로 들릴 수 있다. 청년의 반항은 기성세대의 욕심에 있는지 모른다. 청년에게 다가설 때는 입보다 귀를 먼저 열고 무기력함에 화가 치밀어 올 수 있는 기성세대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부모 자식이라도 조심스럽기 마련이다. 그런데 불특정 다수의 청년을 상대로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염치없는 어른의 행동이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문제의식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청년의 삶을 간섭할 권리는 없다. 보고 듣는 것은 자유다. 그 자유가 청년들과의 관계에서도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음악이라 해서 청년들에게도 좋은 음악이 될 수는 없다. 강요하면 안 되는 것이다. 모두가 힘든 세상이다. 특히 요즘 청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더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청년을 향한 기성세대의 배려는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모두를 기분 좋게 하는 세상, 양보하는 기성세대를 보고 싶다. 청년의 실수를 감싸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자.

가을의 끝에서 여울진 거리 풍경이 왠지 차분하다. 청년을 응원한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새롭게 느껴지는 세대의 아름다운 어울림이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감각의 이해가 청년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청년들에게도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있다. 청년들의 소중한 권리를 지켜주어야 한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라는 청년들의 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