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기고·류진창>부모는 나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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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기고·류진창>부모는 나의 스승
류진창 ㈜와이드팜 회장·수필가
  • 입력 : 2023. 12.07(목) 13:32
류진창 회장
부모는 자식의 으뜸 스승이라는데 아빠는 나의 어떤 스승이 되시지요?

나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딸의 물음이다.

내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은 아버지다. 어릴 적 새벽잠에서 깨신 아버지는 사육신 할아버지를 비롯한 선조들의 얼을 기리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을 시작으로 구구단으로 볏단 묶음을 합산하고 빼는 실용적 참교육을 해주셨다. 내가 대학 1학년 다닐 때다. 하교 시간에 시외버스 정류장 옆 정미소로 4시까지 오라는 것이다. 나는 그 시간에 아버지께서 용돈을 주실 것이라 기대하며 친구 둘과 같이 갔다. 아버지는 두 대의 마차에 일꾼과 같이 왕겨를 담고 계셨다. 나를 보자마자 하얗게 뒤집어쓴 쌀겨 먼지를 털어내시면서, 이제는 네가 저 안에 들어가 일꾼과 같이 왕겨를 담으라 하신다. 너를 이만큼 키워 놨으니 이제 부모의 일을 도울 때가 되었을 것이다. 언제까지 아버지를 평생 일만 하도록 내 버려둘 수 없지 않겠느냐? 우리는 곧 늙어 병들어 죽고 나면 다 너희들 것인데 왜, 아버지만이 이 고생을 해야 하느냐? 꼼 짝 못할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 스물셋에 마을 구장(區長)을 하셨다.

민족의 얼을 끊어버리려는 일제의 서슬은 우리의 고유 대명절 설날에 치도(治道) 공사의 명분으로 울력을 시켰다. 동내 구장인 아버지는 설날이 되기 전 말끔히 치도를 끝냈다. 물론 설 쇠기 위해서다. 설날 아침 고을 관헌(官憲)이 아버지를 불러내더니, 왜 마을 사람을 동원해서 치도 울력을 하지 않느냐면서 지휘봉으로 아버지를 마구 내리쳤다는 것이다. 우리 마을은 이미 치도를 마쳤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 두들겨 맞던 아버지는 관헌을 불끈 들어 올려 마을 앞 미나리꽝에 거꾸로 쳐박아 버렸다. 그리고 그길로 관헌의 자전거를 타고 십리 길 지역 헌병 대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서 나의 행동이 정당하냐? 부당하냐? 대답해라. 대장은 당신의 행동은 매우 정당합니다. 그렇다면 설 쇠기를 방해한 당신의 부하에게는 어떤 벌을 줄 것이며, 그른 행동을 바로잡은 나에게는 어떤 상을 내릴 것인지 대답해라. 잠시 머뭇거리며 난처해하는 대장에게, 다그쳐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이 사건의 책임이 없다는 점만 분명히 대답하라 하니, 당신에게는 절대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면 부하의 처벌은 따지지 않겠다. 퇴로를 비켜준 명쾌한 처방이다. 나의 당당한 위세에 관헌대장이 꼼짝 못 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의기 넘치는 힘자랑 무용담이다.

겨울 농한기의 시골은 마을마다 도박이 성행했다. 우리 집 사랑방은 아버지 또래분들이 방 가득 계셨고, 일꾼 방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저녁이면 모여들어 내기 놀이나 도박을 하였다. 나는 상하 방 심부름을 하고 나면 부스러기 푼돈이 떨어지는 쏠쏠한 재미가 있어 자주 들랑거렸다. 어깨 넘어 도박판을 기웃거리는 나에게 아버지는 일본 관헌을 미나리꽝에 쳐 밖은 이야기를 현장감 있게 다시 들려주시면서 ”남자는 힘이 인격이다“ 주연(酒宴)의 자리에서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이라도 술잔은 힘 있는 사람에게 먼저 간다. 이것이 힘의 위력이다. 난장의 도박판에서 딴 돈을 거리낌 없이 주머니에 넣고 나와도 시비를 떨쳐내지 못할 힘이 이라면 애초부터 화투를 만지지 마라.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빼놓을 수 없는 나의 교훈이다.

지금쯤 아버지는 나의 어떤 스승일까요?

술 취해 늦게 들어오는 내 앞에 무릎 꿇고 묻는 딸이다. 대답하실 때까지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졸음과 조르는 지구력에 밀려 그래! 그래! 시킨 대로 할 게 하였더니, 내일 아침부터 새벽 교회에 나가 참회하십시오. 설상가상이다. 그도 그래! 그래! 하였더니, 다음날 새벽 4시에 여지없이 잠을 깨운다.

우리 인간은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하여 성현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따르려 노력하지 않겠냐. 아빠라는 이름을 지녔다고 그렇게 몰아붙이면 정말 오갈 곳 없는 정신적 고아가 된다. 게(蟹)는 옆으로 가면서 새끼들 에게는 반드시 앞만 보고 가라고 회초리를 든단다. 그 어미 게의 입장으로 아빠를 이해해 주면 어쩌겠니? 이렇게 가을이 되면 잊지 않고 겨드랑이에 책 끼우고 등화가친하려는 아빠가 그나마 대견하지 않으냐? 그간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세월이 묻혀준 허물을 이제 씻어내겠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는 아빠란다. 부모가 못다 한 스승 노릇은 사회가 감당해 주고, 그리고 스스로 깨우치면 된다는 부족한 아빠의 생각에 동의를 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