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손필영>지혜는 세월을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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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손필영>지혜는 세월을 앞선다
손필영 시인·국민대 교수
  • 입력 : 2023. 12.13(수) 15:18
지난 10월 26일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3 대한민국 노인일자리 박람회에서 시민들이 부스를 돌아보고 있다. 뉴시스
손필영 시인
대설 지나 며칠, 이제 2023년은 이십 일도 채 남지 않았다. 우리는 한 해를 보내며 무언가를 돌아보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려 한다. 특히 나이를 먹는다는 생각이 부쩍 드는 생일을 보내면서는 세월 앞에 속수무책이 되지 않으려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도 한다. 문득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라는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크랩은 생일이 되면 녹음을 하는 자신만의 행사를 갖는다. 그렇게 45년 동안 생일마다 녹음을 해왔다. 극 중 장면은 69세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녹음을 하려는 장면이다. 이 의례적인 행사에 앞서 그는 지난 시간 중의 어느 생일날 녹음을 들어본다. 39세의 생일날을 선택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복잡하고 슬픈 마음과 사랑하는 여인과의 추억이 스친다. 그 녹음 안에는 또 지난 25살인지 27살인지 정확하지는 않은 미래에 대한 계획과 불안이 스치는 생일날 녹음을 듣는 소리도 들린다. 39세의 녹음에서 27세쯤의 자신을 어리석고 유치하다고 평가하는데 69세의 생일날도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지려는 39세의 자신의 판단을 어리석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그런 미숙하고 혼란스러운 젊은 날이 지나가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분명 존재하는데 보이지 않고 만나지도 못한 무엇 때문에 고독한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이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는 베케트의 자전적인 요소가 드러난다. 69세의 생일날 그는 혼자서 바나나를 먹으며 지난날의 시간으로 돌아갔다가 녹음기를 되돌려 반복해서 듣다가 생각에 빠지다가 여러 번 침묵에 잠긴다. 마지막까지 그는 69세 생일 기념 녹음을 못한다.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한 것도 기억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녹음 속의 39세의 젊은 그의 목소리가 무대를 채운다. 고독한 가운데 30년 전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회한과 그리움의 침윤일 것이다. 사람 속의 시간은 멈추지 않지만 기억 속에는 언제나 현재여서 크랩은 69세이지만 지금은 39세에 멈춰 있을 것이다.

내년 2024년이 되면 노인 인구가 1천만 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가을부터 뉴스로 접했다. 생활이 안정된 분들을 제외하고 노인 기초 연금을 지급하게 된다면 경제적으로 힘든 분들이 조금 더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일자리 창출 등 가장 시급한 것이 경제적인 부분이겠지만 노인들이 느낄 고독감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궁금하다. 작가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래전에 죽은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를 찾아 그를 추방하는 것으로 형벌을 설정했다. 그리이스인들은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고독과 추위 속에서 노년을 보내는 일이 가장 비극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앞으로 전체인구의 20%가 넘는 노인들이 소외감과 고독감에 빠지게 된다면 나라 전체도 어둡고 우울할 것이다.

말리 출신 작가인 아마도우(Amadou Hampate Ba)는 1960년대 유네스코 회의장에서 “아프리카에서는 노인이 죽으면 한 개의 도서관이 불타버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문화와 전통이 구전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했겠지만 진정 이 말은 어느 시대나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책에 기록된 이론만으로 살 수 없다. 앞으로 AI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체험을 통한 지식과 직관은 삶을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황과 경우에 따라 앞으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 닥칠 때 우리는 통계와 과학만으로 해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노인의 지혜는 시간의 숙성과 경험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삶의 결과이므로 미래까지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내년부터 노인 인구가 일천만 명 이상이 될 것이라고 걱정하기보다 노인들이 고독감에서 벗어나 행복하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여 그들이 지혜를 사회로 흘려보낼 수 있다면 어떨까? 넷플릭스에서 지난 11월부터 방영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오징어 게임: 더 체린지>의 최후 승자는 베트남 출신의 55세의 여성이었다. 과정이야 어찌됐던 그녀는 456명의 참가자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 비결은 난민으로 이방인으로 35년 넘게 살아온 그녀만의 지혜와 삶의 경험에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늘어나는 노인들의 시간이 축적한 지혜와 경험이 사회 곳곳으로 흘러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