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작가 에세이·박영덕>부끄러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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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작가 에세이·박영덕>부끄러움에 대하여
박영덕 광주문인협회 수석부회장·수필가
  • 입력 : 2023. 12.14(목) 12:54
박영덕 수필가
교수신문이 올해도 어김없이 교수들의 뜻을 모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상징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나 ’남우충수‘(濫竽充數) 등도 순위에 올랐으나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가 추천한 ‘견리망의(見利忘義)’가 으뜸으로 꼽혔다. ‘견리망의’란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뜻이다. 원래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에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라’는 뜻의 ‘견리사의(見利思義)’가 처음 등장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와 정반대인 견리망의가 세상에 퍼지게 됐단다.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여 의로움은 뒷전으로 밀어내 버리는 작금의 세태를 꼬집은 것이라는데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양심의 부재를 꼬집은 것이라 하겠다.

공자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길가 숲에서 대변을 보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그 사람을 데리고 오도록 하여 호되게 꾸중하였는데 그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싸매고 도망쳤다. 얼마 후 이번에는 길 한 가운데에 대변을 보는 사람을 만났다. 그러자 공자는 제자들에게 저 사람을 피해서 가자고 했다. 제자들이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선생님, 어찌하여 길 가운데에 똥을 싸는 저 자를 피해 갑니까? 저자는 길가에 똥을 싼 놈보다 더 나쁜 놈인데요.” 이에 공자가 답하기를 “저 자는 아예 양심도 없는 자다. 길가에 똥을 싸는 자는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양심이라도 있으니 가르치면 되지만 아예 길 한가운데서 똥을 싸는 자는 양심이라는 것이 없으니 어찌 가르칠 수 있겠느냐?” 했다. 천하의 공자도 양심이 없는 인간 즉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한들 그게 무슨 대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미 만물의 영장으로서 진화가 끝난 인간에게 부끄러움은 맹장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퇴행적 감정이며, 치열한 선두 다툼에서 살아남으려면 오히려 없는 편이 유리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변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권력자들은 대개 후안무치했다. 낯가죽이 두꺼워 내면의 감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며 권력 행사를 했다.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몇 몇 리더가 모든 정보를 거머쥐고 여론을 장악하여 일방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관철해 가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이제는 쌍방향 뉴스와 인터넷과 언론 소셜미디어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민주주의가 궤도에 오르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부끄러움을 아는,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이웃과 친구와 가족의 눈에 인간적인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어 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정의를 위해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 영웅이 된다. 반대로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의 언행은 인터넷과 언론, 소셜미디어에 의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무한정 퍼져나가 만인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들이 감추려고 하는 것일수록 광속으로 중계되는 사회적 언어로 번역되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종내에는 공분을 산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러한 과정이 순식간에 다층적으로 일어난다. 그걸 모르거나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까맣게 잊고 살던 부끄러움을 소생시킬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길 한가운데에 똥을 싸는 행동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굳이 성인의 말씀을 들추지 않아도 부끄러움은 인간이라면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닌가. 그래서 ‘부끄럼을 타는 사람’ 혹은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 같은 표현보다 ‘부끄럼을 아는 사람’, 혹은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알고 염치를 아는 사람, 부끄러움 유전자를 세대에 걸쳐 유전 시킬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환영받을 것임이 분명하다. 견리망의(見利忘義)를 내 놓은 김병기 교수는 “불행하게도 올해는 견리망의의 한 해였지만 내년에는 견리망의가 아닌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지금처럼 출세와 권력이라는 이익이 전부인 세상, 절실한 마음으로 그의 말이 현실로 다가오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