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작가 에세이>자연의 순환과 인간 윤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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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작가 에세이>자연의 순환과 인간 윤리의 길
탁현수 문학박사·수필가·호남대 외래교수
  • 입력 : 2023. 12.21(목) 12:36
탁현수 수필가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마당으로 나선다. 초봄부터 시작한 뜰 가꾸기의 매력은 동장군이 북풍한설을 앞세워 멈춤이란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손을 놓을 수가 없다. 훈풍을 가득 실은 봄 햇살이 울안을 넘나들면, 황막하게 언 땅을 뚫고 뾰족뾰족 여린 잎을 틔우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이 화단 가득 벌어진다. 날이 갈수록 농염하고 그윽해지는 햇살과 바람의 요술에 홍매를 앞장세운 진달래, 꽃앵두, 금낭화, 매발톱, 제비꽃 등이 그야말로 곱디고운 봄 잔치를 펼친다.

신기한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겉으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보이는 그들이지만, 발 아래를 세심히 들여다보면 늦봄을 장식할 섬초롱, 애기달맞이꽃, 대나물, 우단동자 등의 여린 잎들을 끌어안느라 허리조차 펴지 못한 것들이 많다. 화단의 흙을 담아 키우는 화분 안에서도 어김없이 공생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백합과 봉숭아, 석죽과 용담, 돌나물과 개미취, 달맞이꽃과 국화 등 개화기가 서로 다른 꽃들이 계절의 순환에 순응하며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한 둥지에서 고락을 같이하는 가족을 보는 듯도 하다.

하지만 자연의 질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인내와 희생과 포용은 물론이고 시간이라는 그들만의 엄격한 조율 속에서 피워내고 또 스러지고를 반복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맞물려 안고 돌아가는 순환의 톱니바퀴는 스스로 멈출 수도 없고 멈춰서도 안 된다. 마치 애면글면 후손들의 앞날을 끌어안고 험난한 인생 바다를 유영하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랄까.

다산 정약용은 인간 삶 속의 윤리 근간을 효(孝), 제(弟), 자(慈)로 정의한 바 있다. 효란 부모는 물론 임금을 포함한 모든 연장자에 대한 예로 인간관계의 뿌리 역할을 한다고 했으며, 제는 친구, 형제, 동료 등 수평적 관계의 우애로 인연과 신의가 중시된다고 보았다. 자는 임금이 백성을, 부모가 자식을, 또는 스승이 제자를 사랑하는 등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 대한 자애이며 도리라고 했다. 개인적인 관계를 뛰어넘어 인류적인 차원으로 넓게 해석한 다산의 인간 윤리 중 다산 자신이 가장 마음에 담고 중하게 여겼던 것은 자의 실천이었다. 윗사람이 사랑의 싹을 잘 틔워내야 아랫사람에 이르러 더욱 숭고하게 피어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더구나 다산은 아버지로서 자식을 사랑하고 교육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18년 동안이나 남녘 땅끝에서 유배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어쩌지도 못하는 그 상황 속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서간문들은 편 편마다 곁에서 지켜보며 보살피듯 간곡하고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해배의 순간까지 제자 교육에 열중했던 것도 그런 정신의 연장선상에서가 아니었을까 한다.

인간으로서, 그중에서도 부모로서 자손이 번창하고 잘 자라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순리이며 이 세상이 영위될 수 있는 순환의 고리다. 다산 역시 자는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인(仁)의 덕목으로 오히려 가장 실천하기 쉽다고 표현했다. 달포 전 50년 지기 친구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큰 수술을 받았다. 중환자실에서 겨우 의식을 찾으면서 했던 첫말이 손주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죽게 해달라고 누군지도 모르는 절대자에게 간절히 애원했노라는 고백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은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마지막 순간에 그 자리를 대신해줄 거라고 믿는 후손을 바라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본능일 것이다.

하늘의 선택이기에 스스로는 깰 수조차 없는 부모, 자식 간의 숙명적인 인연. 요즈음 부쩍 그 천륜이 무너지는 소리가 세상을 아프게 하고 있다. 숭고한 인연으로 세상에 왔건만,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아이들. 그것도 부모에 의해서라니…. 왔던 꽃이 진 자리에 새로운 꽃이 다시 오고 그 꽃이 또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자연의 원칙과 방식은, 스스로 그렇게(自然) 될 수밖에 없는 까닭(所以然)에 순응하는 참다운 모습의 본보기가 아닐까. 이처럼 ‘절로 절로’의 섭리는 다산을 위시한 선인들에게 있어서도 참된 인생살이의 정답으로 가는 길목 쯤으로 여겼던 듯하다. 순연한 마음으로 화단 앞에 섰다. 지금 지고 있는 꽃 또한 내일을 안고 회한 없이 기꺼이 떠나리라 믿으며, 희망의 햇살을 온 마음 가득 받아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