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타적 유전자·박재항>듣는 게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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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이타적 유전자·박재항>듣는 게 먼저다
박재항 이화여대 겸임교수
  • 입력 : 2023. 12.27(수) 14:26
박재항 겸임교수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층을 주대상으로 한 마케팅 활동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쌓아온 기업 대학내일에서 ‘사범(師範)’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주일 몇 차례 씩 나가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사범이라는 직함에 맞게 한 일의 대표로, 대학 시절에 마케팅 수업을 듣지 않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마케팅 25강 수업을 맡아 강의했다. 매주 한 시간 좀 넘게 하는 수업에 7~8명 정도가 참석을 했다. 그러던 어느 한 주는 수강생 친구들에게 이상하게 일이 많이 몰려서, 한 명이나 두 명만 수업에 나올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해당 주에 휴강을 하자는 말이 나왔는데, 그들에게 나의 대학 시절 한 스승님의 일화를 얘기해 주었다.

일천만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인 ‘서울의 봄’이 좌절된 이후의 1980년대에 나는 대학을 다녔다. 경찰들이 학교 안 곳곳에 머물러 감시의 눈을 부라리고 있었지만,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학생운동의 전위로까지 불렸던 우리 과에서는 제법 큰 단위로 시위가 열릴 때면, 과 전체가 수업 거부를 하고 시위를 하러 나가곤 했다. 수업 거부를 하게 되면 선생님들께 미리 말씀을 드리곤 했는데, 최고 원로 선생님의 수업에서는 학생 대표가 무서워서인지 말씀도 사전에 드리지 못한 채, 그냥 강의 시간에 단체로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과 학생들이야 스무 명 남짓하고 학과 사무실에서 같이 회의도 하며 수업 거부의 결의를 다지고, 모두가 함께 단체행동을 했는데, 같은 수업을 듣는 다른 학과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도 거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서, 그 친구 혼자 수업에 들어가서 그 무서운 선생님과 독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선생님께서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그 학생 하나만 앉혀 놓고 평소와 다름없이 두 시간 동안 수업을 하셨다.

대학내일에서 마케팅 수업을 받던 친구들에게, 나는 그런 선생님께 배워서 한 명만 수업에 참여해도 정상적으로 진행을 하겠노라 얘기했다. 그런데 정말 딱 한 명의 여성 직원만 수업에 들어왔다. 대학 스승님이 하신 것처럼 한 시간을 정상적으로 진도를 나갔다. 수업이 끝난 후에 그 직원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덧붙였다. “사범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두 시간 동안 혼자 수업을 들어야 했던 여학생의 기분이 어땠는지 좀 알 것 같아요.”

단 한 명의 학생을 앞에 두고도 두 시간 동안 수업을 진행했던 일화를 들으면, 그 선생님을 조금이라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깐깐하고 원칙주의자인 선생님다운 행동이라고 한다. 비슷한 분야의 전공 공부를 하고, 나나 공통의 지인들에게서 그 선생님의 얘기를 많이 들었던 내 처는, 선생님 당신의 평판은 지키시고 원칙에 충실하셨지만 혼자 수업을 들어야 했던 학생, 그리고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던 다수 학생들에 대한 배려는 없었던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원칙의 고수와 학생들에 대한 배려의 양쪽에서 잘잘못을 어떻게 따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학문에 관한한 세계 최고 석학이란 평가를 받으시고, 한국의 해당 학계 위상까지 올린 위업에 그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총통’, ‘독재자’와 같은 별명처럼 학생들이나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듣거나 귀를 기울여주는 데는 부족하셨던 것 같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사정을 들어주고 할 여유가 없었다며, 당신도 가끔 말씀하신 ‘해는 기우는데 갈 길은 멀다’라는 춘추전국시대 오자서(伍子胥)의 ‘일모도원(日暮途遠)’ 사자성어를 들어 변명을 하실 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어른들, 아니 지금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도 사실 남의 말을 들어주는 데 서툴다.

코로나19 직전의 2019년 대학내일에서 인턴 생활을 한 친구들 몇몇도 사범으로 교육을 했던 인연으로 지금도 일년에 서너 차례 씩 만난다. 그 중 한 친구는 나의 이전 직장 동료의 아들이다. 그 이전 동료가 이런 부탁을 했다.

“내가 경상도 촌놈으로 아들이랑 얘기만 할라치면 싸우게 되네. 이 부끄러운 애비 대신 아들놈 얘기 좀 들어주소.”

자신과는 서먹한 부자관계인 아버지의 친구로, 불쑥 앞에 나타난 내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쭉 전했다. ‘좋은 얘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했는데, 사실 그에게 젊은이들의 우정, 놀이, 가족 관계 등의 현상과 생각을 듣는 고마운 시간이었다. 이후로도 둘만 몇 차례 만나기도 했다.

인턴을 하기 전인 2016년 가을학기 학교 수업 시간에 내 특강을 들었는데, 2019년 대학내일에서 인턴으로 다시 수업을 듣게 되었다며, 먼저 연락을 해와서 자리를 함께 한 친구도 있다. 함께 인턴을 하는 그와 같은 학교의 친구까지 해서 몇 차례 자리를 같이 하다가, 동료 아들까지 인턴들을 모아서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을 결성했다. 올해 연말 함께 한 자리에서 그중 한 친구가 선물과 함께 세 줄의 짧은 인사가 담긴 감사 카드를 전해주었다.

‘들어주시고

얘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그 20대 친구들에게 내가 해야 할 인사말이었다. 30년 이상 나이차가 나는 이와 한자리에 앉아,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시답지 않은 소리에도 반응을 해주니 말이다. 요즘 주로 쓰는 세대로 따지면 Z세대와 베이비부머의 만남이다. 감사 카드의 짧은 인사말에도 주목할 부분이 있다. ‘들어주는’ 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먼저 나온다는 것이다. 그가 의도적으로 순서를 그리 매겼는지 모르겠으나, 들어주는 것에 먼저 감사를 전했다.

베이비부머인 또래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 뿐만 아니라 좀 아래의 소위 X세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요즘 젊은 애들’의 행태에 대한 비판이 거의 항상 화제로 낀다. 신경 써서 들어보면, 그들 ‘요즘 젊은 애들’과 대화를 나눈 경우는 거의 없고, 한 마디 흘려 듣거나 언론에서 본 것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방적으로 얘기를 했다가 원하는 반응이 안 나와 못마땅해 하기도 한다. 방관과 무시 속에 피해의식이 겹쳐서 오해가 쌓이고 적대관계라고 해도 과장이 아닌 상태가 된다.

대화를 하자. 그러려면 듣는 게 먼저다. 그게 서로 사는 길이다. 너무나 평범하고 상투적이라 해결책이라 하기도 뭐하지만, 진리란, 올바름이란 그렇지 않은가. 그런 세대 간의 대화가 곳곳에서 퍼지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새해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