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작가 에세이>새해엔 건강, 감동의 시를 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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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작가 에세이>새해엔 건강, 감동의 시를 쓰리라
박래흥 광주문인협회 부회장·시인·수필가
  • 입력 : 2024. 01.18(목) 14:04
박래흥 부회장
새해를 맞는 마음은 설레면서도 분주하다. 신년 해라고 다른 모습이 아니지만 새해 해돋이를 보기 위해 무등산 중머리재를 올라가고 해를 잘 볼 수 있는 앞산이나 가까운 바닷가를 찾기도 한다. 신년의 해를 보면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짐한다. 옛말에 일 년의 계획은 정월 초하루에 세우고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세운다고 했다. 나는 새해마다 계획은 많이 거대하게 세우지만 송년의 결과는 미미하여 후회를 한다.

작년 시월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두 번 무등산을 올랐다. 한 번은 증심사 종점에서 새인봉→중머리재→봉황대→바람재→산장 코스이고, 또 한 번은 증심교 왼쪽 돌계단 절벽으로 올라가서 토끼등 광장에 이르면 바람재 쪽으로 뛰어 갔고 지치면 쉬엄쉬엄 산장으로 내려왔다. 76세의 나이인데 내가 건강에 너무 자신만만했고 위대한 자연에 대해 경솔했었는지 작년 시월부터 무릎이 아파서 병원을 찾았더니 산행은 중지하고 가볍게 평지를 걷으라고 말했다.

영국에는 최고의 명문 학교 ‘이튼 칼리지’가 있다. 이 학교는 우리나라 고등학교처럼 명문대에 들어가는 교과목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교과목 중 제일 중요한 과목으로 체육을 든다. 공부보다 체육을 통해 ‘함께 하는 정신’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겨울이면 진흙탕 속에서 레슬링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페어플레이 정신’을 기르기 위해서다. 자신이 출세를 하거나 자신만이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 주변을 위하고, 사회나 나라가 어려울 때 솔선수범하여 제일 먼저 달려가 선두에 설줄 아는 사람을 원했기 때문이다.

2024년에는 꼭 이룰 수 있는 두 가지의 계획만 세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첫째 노년에는 건강이 최고다. 건강을 위해서 평지를 걷기로 계획했다. 광주시 동구 증심사 가는 길에서 학운초등학교 못 가 오른쪽 계곡으로 빠지면 동적골이라는 2㎞ 정도의 긴 계곡이 있다. 일주일에 2번 그 길을 걷기로 다짐했다. 그 길을 선택한 이유는 아름다운 추억 때문이다. 1968년 대학교 선배였던 천재 시인 김만옥이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잡지사에 글을 투고하여 시, 소설, 수필, 동화, 각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된 상금으로 큰 전셋집을 얻어 살다가 살림이 궁핍해지면 동적골 초입 산밭에 움막집을 손수 짓고 살았다. 어느 날 서울에 신춘문예 시상식에 갔다 왔는데 도둑이 들었다. 그때 그는 훔쳐갈 것도 없는데 도둑이 들었다며 가장 재수 없는 도둑이라고 말했다. 문우들도 소주병을 들고 자주 찾던 집이다.

두번째는 송나라 문인 구양수의 삼다(多讀, 多作, 多商量)를 철저히 공부해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최고의 시를 쓰자고 다짐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종교학 과목시험에 출제된 주관식 문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의 기적에 대해 논하라’였다. 시험시작 종이 울리자 일제히 답안지에 펜촉 닿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지만, 유독 한 학생만은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화가 난 감독 교수가 다가가 백지 제출은 당연히 영점 처리되고 학사경고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뭐든 써 넣어야 한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이 말에 딴청을 피우던 학생의 시선이 돌연 시험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정말 단 한 줄만 써 놓고 고사장을 유유히 빠져 나갔다. 그리고 달랑 한 줄 답안지는 이 대학 신학과 창립이후 전설이 된 만점 답안지가 되었다.

학생의 이름은 영국의 3대 낭만파 시인 중 한 사람인 조지 고든 바이런. 대학의 모든 신학교수들을 감동시킨 바이런의 촌철살인 답안은 이랬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을 붉히더라’. 예수께서 처음으로 기적을 일으키신 포도주를 이렇게 멋지게 표현한 바이런이 온 세계 문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주는 좋은 시가 되었다. 시는 길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의미를 함축 요약 해야 한다. 평범한 물이 그 주인 예수를 만나 붉은 포도주로 변하고 한 잔을 마시면 얼굴이 붉어진다는 시각적 이미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김기림 시인의 말처럼 시인의 내부에서 아름다운 생활과 아름다운 시에 대한 선택이 절박되었을 때 그 어느 것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대체로 그 순간 시인의 모랄이 결정할 것이나 인간의 일반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아름다운 시보다는 아름다운 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양심도 없이 방탕한 삶을 사는 시인이 천부적인 소질로 아름다운 시를 쓰는 것은 가식이다. 시는 사무사의 경지, 작가의 아름다운 삶에서 감동을 주는 시가 나온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의 시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향수요, 아름다운 인간에 대한 불타는 그리움과 추구 밖에 또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