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이름모를 부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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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이름모를 부부에게
최도철 미디어국장
  • 입력 : 2024. 04.22(월) 16:01
최도철 국장
주당 8달러 짜리 작은 집에 세 들어 사는 지독하게 가난한 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물을 준비한다.

남편 짐은 아내를 위해 부모에게 받은 줄이 없는 시계를 팔아 예쁘고 멋진 머리빗을 마련한다. 아내 델라는 곱고 탐스럽게 기른 머리카락을 잘라 판 돈으로 남편에게 선물할 시곗줄을 산다.

크리스마스 날, 선물을 주고받은 부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린다. 오 헨리(O. Henry)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 가운데 한 대목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가려는 차, 건듯 부는 바람에 어디선가 욱복한 꽃향기가 실려 왔다. 라일락인지, 숭어리째 피어 있는 히야신스인지 향원은 알 수 없으나 바람과 향기에 홀려 잠시 해찰하기로 했다.

이런 날이면 일부러 가는 커피집이 있다. 신접살림을 차린 부부가 하는 동명동 푸른길 끄트머리 작은 카페다. 부부는 올드팝을 좋아하는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오래된 노래들을 곧잘 틀어 놓는다.

그 집으로 가는 길 모퉁이를 돌아들면 으레 노랫소리가 들렸는데, 웬걸 문 앞에 손글씨로 쓴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문을 닫는다며, 그동안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는 내용이다. 장사가 잘 되지않아 힘들다는 이야기를 간혹 했는데 끝내 닫은 모양이다. 아쉽고 짠하다. 저간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젊은 부부에게 힘이 되는 말 한마디라도 건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서니 나 같은 손님들이 꽤 있었는지 안내문 옆에 노란색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용기를 내 다시 시작하라는 응원과 격려의 글이다. 때로는 손바닥에 쓸만한 몇 줄의 글이 큰 감동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문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이문재 시인이 펴낸 시집 ‘마음의 오지’에 실린 ‘노독’이라는 시다.

가던 길 어두워 끝내 내려서야만 했던 젊은 부부에게 권하고 싶다. 사랑하는 그 마음 오래도록 간직하고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를 또 한번 짓기 위해 다시 ‘함부로’ 길을 나설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