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훈 톡톡브레인심리발달연구소장 |
다른 한 곳이 외할머니 댁이었다. 외할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외할머니는 곰방대에 담배를 피웠다. 외할머니 댁을 방문할 때는 버스를 타고 해남 황산면 상등리에서 내려 자그마한 상점에 들러 봉초 담배를 산 뒤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 외할머니의 살갑고 따뜻한 환대는 무거운 내 마음의 짐을 녹이곤 했다. 내가 대학교 시절에 동생이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10개월 정도를 병원에서 수발을 했었다. 나는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디스크 등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 때도 외할머니께서 일년 동안 나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온전히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나는 바닷가에서 자라면서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할아버지께서는 밤 늦게 물건을 팔러 우리 집에 찾아 온 행상들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집의 사랑방에 재운 후 아침 밥까지 대접해 보냈다.
이런 경험들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기분이 좋아지고 삶의 의미가 느껴지는 나의 생황양식이 되었다는 것을 훗날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 방학은 약간의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합법적인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십리 이상을 걸어서 다녀야 했기 때문에 도회지 고등학생만큼이나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다. 산 넘고 개울을 건너 학교에 가지만 장마철에는 큰물이 지면 개울을 건너기 힘들어 낭패를 겪기도 했다. 방학 동안에는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다.
상담을 하면서 내담자들에게 가장 즐거웠던 기억을 세 가지 쯤 꺼내 이야기하라고 요청한다. 나의 질문에 이야기가 아니라 울음으로 대답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과 기억은 각자 삶의 방향을 가르키는 생활양식을 만든다. 요즈음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려는 후보자들을 많이 본다. 자신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여기는가 보다. 생활양식이 그렇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삶은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달성하기 위해 활동한다. 개인에 따라 활동 수준은 다르다. 개인의 활동 수준에 따라 개인이 설정한 목표를 성취하는 수준도 다르다. 사람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주저하게 되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인한 것이다. 마치 아이들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부모가 없을 때 느끼는 불안이랄까.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을 제거하고 활동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즉 사람들이 겪는 다양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수용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가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의 진정한 변화는 개인이 있는 그대로 자신이 되려고 노력할 때 가능하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자신이 원하는 성공이나 삶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열등감 콤플렉스 혹은 우월감 콤플렉스로 인한 고통을 경험한다. 진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열등하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서양의 격언 진실처럼 상처를 주는 것은 없다는 말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용기 중에서 최상의 용기는 불완전할 용기이다. 개인은 독특한 존재다. 그리고 충분한 존재다. 그러나 상식, 공감, 관용, 사회적 관심을 가진 독특한 존재일 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다. 진실처럼 상처를 주는 것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장점과 한계가 있다. 그 한계와 단점 또한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