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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육은 '선'을 지우는 데서 시작한다
"서울은 물론이고 그 제도 자체가 없는 지역도 많아요. 다자녀라고 혜택을 주다보면 끝도 없어요. 다만 저희는 학생들에게 통학 편의를 제공하려 마련했을 뿐이에요." '다자녀가정 학생 형제·자매 동일교 우선배정 정책'의 나이제한 규정에 대한 전남도교육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해당 정책은 저출산 문제 해결책으로 마련됐다. 지난 2015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3자녀 이상의 다자녀가정 학생은 형제·자매가 재학 중인 중학교에 우선적으로 배정 받을 수 있게 됐다. 올해 처음으로 고등학교 배정에 해당 정책을 도입한 도교육청은 '18세 미만 3자녀 이상'으로 나이 제한 규정을 뒀다. 규정대로라면 다자녀가정이더라도 성년인 자녀가 있으면 나머지 자녀들은 같은 학교에 우선 지원할 수 없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두 자녀 가정 학생과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정작 두 자녀 가정 학생들은 우선배정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며 "나이제한을 두지 않으면 두 자녀 가정 학생에 역차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역차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발언이다. 역차별은 차별받던 소수집단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 되레 다수집단에게 차별이 되는 경우에 사용되는 단어다. 다자녀가정 정책이 시행되는 배경을 감안하면 해당 발언의 맥락은 부적절하다. 다자녀가정 학생들이 '혜택을 받기 위해' 넘어야 할 '선'은 정책의 수 만큼이나 많다. 다자녀가정 우선배정 제도는 저출산을 '(극복해야 할) 문제'로 진단한 데서 만들어졌다. 제도가 필요한 사람의 눈높이 대신 제도를 만드는 사람의 눈높이가 반영된 것이다. 해당 제도에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선심쓰듯 만들었다'는 태도가 배어있는 이유다. 코로나19 여파로 최근 교육계의 화두는 '미래교육'이 됐다. 단어에서 느껴지듯 '무엇을 미래교육으로 정의할 것인가'도 아직은 뚜렷하지 않은 상태다. 도교육청은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미래교육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즉, 전남교육의 미래는 '모든 아이가 그 혜택을 누릴 때' 실현되는 셈이다. 좋은(善) 복지엔 선(線)이 없다. 전남은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소멸 고위험지역(2020년 10월 기준)에 해당된다. 도교육청이 다자녀가정 우선배정을 뒤늦게나마 도입한 까닭이다. 하지만 다자녀가정에 대한 정책이 '편의를 주기위한 시혜적인 것'이라는 발상은 제도에 선을 그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마련한 제도지만, 그 선을 넘지 못한 교육가정들은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도교육청은 타 교육청 사례를 참고해 제도를 검토해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앞으로 열릴 논의의 장에서는 학생들의 눈으로 선을 지웠으면 한다. 그 선을 지우지 않으면 전남의 미래교육은 저 멀리 안개 속에 머물러 있을 지도 모른다.
아주 보통의 권리
광주지방경찰청에서 '지방'이라는 단어가 빠지면서 지난 4일 광주경찰청으로서 첫 시작을 알렸다. 자치경찰제는 지방자치단체에 경찰권을 부여하는 것인데, 국가 전체를 담당하는 중앙경찰과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자치경찰제가 도입되면 경찰은 소속된 지역의 치안과 복리에 집중하게 된다고 또 국가수사본부 등 전문 수사 조직이 대부분의 형사 사건에 대한 1차 수사종결권을 갖게 된다. 그런데 광주경찰청의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다. 한 파출소에 소속된 현직 경찰이 금은방에 침입해 2500만원 상당의 귀금속을 훔쳐 달아났다. 범행의 동기는 개인적인 채무 1억9000여만원의 해결이었다. 현직 경찰이 절도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범인은 업무적으로 크게 불성실하지 않았고 치안에도 적극적인 경찰이었다고 한다. 경찰 내부에서 한 직원의 속사정까지 알기에는 무리였던 것일까. 다액의 채무에는 도박 빚이 원인이라는 후문이 돌았지만, 경찰은 "도박 여부에는 확인된 바가 없다"고 못을 박았다.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에도 도박과 관련된 혐의는 포함되지 않았으며, 범인도 영장실질심사 전후 기자들의 질문에 "도박 빚은 아니다"고 짧게 대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범인이 인터넷 도박 사이트에 접속해 돈거래를 한 정황도 추가로 드러났으며 광주경찰청 사이버수사대도 도박 혐의에 대한 정식수사에까지 착수했다. 말을 아꼈던 경찰은 제 식구 감싸기부터 했다는 비판을 받는 중이다. 경찰의 권한은 비대해지고 있다. 경찰은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사의 수사 지휘를 받지 않는 데다 1차 수사종결 권한까지 부여받았다. 경찰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피의사실 공표죄"다. 최근 경찰 내부 사무실에 기자들의 출입을 막는다는 공문도 내려왔다고. 현직 경찰이 도박에 손을 대 빚까지 지고, 절도라는 범행까지 이어진 일은 어쩌며 그들에게 공표하지 않아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아주 보통의 권리인 '국민들의 알권리'는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지 생각에 꼬리를 문다.
코로나19보다 정부가 더 무서운 요양환자들
최근 전국적으로 요양병원 발 코로나19 확산세가 거세다. 광주에서도 효정요양병원과 에버그린요양원 관련 확진자가 200여 명에 달하면서, 안 그래도 고령과 숙환 등으로 인해 코로나19 취약계층으로 분류되는 요양환자의 안위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날짜가 바뀔수록 늘어나는 중등증·위중증 환자 수와 사망 소식만이 속보로 날아들고 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정부는 요양병원 등 요양시설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를 신속히 분리하고 전담 치료하기 위한 '감염병 전담 요양병원'을 전국적으로 지난 4일 지정했다. 광주에서는 북구 헤아림요양병원이, 전남에서는 광양우리병원이 선정돼 운영에 들어가거나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지정된 요양병원에 1일당 병상단가 이상을, 기존 입원해 있던 요양환자에 대해서는 병상단가의 50% 이상을 추가로 보상하기로 했다. 앞서 전담병원으로 지정됐던 빛고을전남대병원과 광주시립제2요양병원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경영 위기에 몰리거나 심지어 철회 요청까지 한 전례를 고려한 듯하다. 하지만 정부가 이번에 제시한 보상안이 병원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요양환자의 안전은 나 몰라라 한 처사라며 불만을 표출하는 이들이 적잖다. 기존 입원해 있던 요양환자에 대한 퇴원 조치가 이뤄지면서 갑작스럽게 길바닥에 내몰린 꼴이 된 것이다. "말년에 자식들 병수발 고생시키며 원망받느니 얼른 죽어야지." 강제로 퇴원 당하다시피 해서 자식들 집으로 가야 하는 환자들은 거동이 불편한 몸보다도 마음이 더 편치 않다. 요양환자는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았어도 치료와 보살핌이 24시간 필요한 취약계층이다. 요양병원 확진자 병상 수 늘리기에 매몰되다 보니 정작 쫓겨나게 될 기존 요양환자를 위한 대안 마련에 너무도 소홀한 듯싶다. 병상 확보와 더불어 기존 환자의 전원 조치를 최우선으로 진행하는 게 기본적인 순서이자 마땅한 도리다. 정부가 코로나19 대응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은 칭찬할 부분이지만,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코로나19에 매몰돼 있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팬데믹 장기화로 모든 초점이 감염병 예방과 치료에 집중되다 보니, 못지않게 중요하거나 심각한 문제에는 반응이 무뎌진 게 아닐까. 정부는 앞으로도 감염 추세를 살피며 전담 요양병원을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전담 요양병원 운영이 일시적인 상황 타개를 위한 일회용 정책이 아니라면, 기존 요양환자를 위한 적절한 대책을 먼저 수립해야 한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괸다'는 소리를 듣기 싫다면 말이다.
'배달 주객전도' 끝내야 할 때
한 해가 저물어가던 지난달 30일. 광주에는 올 겨울 처음으로 대설특보가 내렸다. 전날 저녁부터 내린 눈은 높게 쌓였고, 도로는 꽁꽁 얼어붙어 출근길 시민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베테랑 운전자도 힘들어할 정도였던 도로에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그 흔했던 오토바이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비상 깜빡이를 켜고 날쌔게 달려 다니던 오토바이 배달 라이더들은 무섭게 쌓인 눈에 결국 그날 일당을 포기했다. 이들의 포기 선언에 배달만 바라보던 식음료 자영업자들도 어쩔 수 없이 그날 장사를 포기해야만 했다. 배달 앱에 '영업 중'이라 표시된 매장들은 대부분 포장 주문만 가능했고, 몇몇 매장은 조금이라도 더 벌어보고자 가까운 거리일 경우에 한해 가게 직원이 직접 도보로 배달하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이미 큰 홍역을 겪은 자영업자들은 매장 매출 감소뿐 아니라 배달이 안되면 울며 겨자 먹기로 가게 문을 닫아야 하는 이중고에 빠져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배달을 포기할 수는 없다. 코로나19 이후 외식을 하는 손님들이 줄면서 배달 앱 시장이 연 10조원 규모로 커졌기 때문이다. 정부 역시 지난해 12월 29일부터 배달 앱으로 음식을 4차례 시켜 먹으면 1만원을 돌려주는 '외식 소비 쿠폰' 행사를 지원하며 배달 앱 중심의 외식 활성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결국 자영업자들에게 배달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배달 대행업체들은 지난 1일부터 기본 수수료를 500원씩 인상했다. 악천후와 거리 할증까지 붙을 경우에는 그 이상의 배달료를 지불해야 한다. 배달 대행업체는 배달비를 일제히 인상시킨 이유에 대해 코로나19로 인한 배달 주문 증가와 배달 라이더 부족, 배달 앱 노동자 고용보험 적용 등을 언급했다. 게다가 앞으로는 폭설, 폭우, 혹한 등 날씨에 따른 갑작스러운 배달 중단이 전보다 빈번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가 배달 라이더 대상 안전 규제를 확대하면서 배달 대행업체들도 과거처럼 악천후에도 배달 강행을 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등장 이후 배달 서비스가 미치는 영향은 소비자 뿐만 아니라 자영업자에게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리고 비대면 소비 증가로 배달 시장이 걷잡을 수없이 커지면서 배달 라이더가 부족하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 피해가 고스란히 자영업자들에게 옮겨가는 것은 잘못된 구조임이 분명하다. 최근 정부는 배달라이더에 관한 법률 제정을 추진, 배달 대행업체와 라이더 간 수수료와 계약기간, 분쟁 해결 절차 등을 담은 표준계약서 도입을 통해 처우개선에 나서고 있다. 표준계약서 확대 등을 통해 이제라도 수수료 문제로 인한 '주객전도'의 상황을 끝내고, 자영업자와 그들의 발이 되어줄 배달 라이더 그리고 소비자가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새해에는 코로나가 없어지길"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할 때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역 내 소상공인의 어려운 상황을 취재했다. 그때마다 소상공인들은 "더는 못 버팁니다"라며 하소연했다. 당시 소상공인에게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세요. 멀지 않아 코로나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날이 올 겁니다"라고 말은 했지만, 그렇게 한해가 지나갔다. 코로나 확산세는 멈추지 않고 있고, 당시 소상공인에게 건넸던 말은 결국 희망 고문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길거리에서 소상공인들을 볼 때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난 2020년 전 세계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고통을 겪었고 1년 동안 우리의 삶에는 많은 것이 변했다. 언제 어디서나 마스크를 착용하고 타인과의 접촉이 끊어진 채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가 점점 우리에게 무뎌진 탓인지 주변에 어느새 방역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마스크만 착용했을 뿐, 거리두기 등의 조치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요즘은 어느 곳을 가든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코로나가 대한민국에 상륙한 지 벌써 1년이 됐다. 2021년 새해가 밝았지만, 달라진 건 없다. 매번 상황은 비슷했거나 더 심해졌다. 좋아진 적은 없다. 이 정도 상황이 되다 보니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코로나19가 장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십년 뒤에는 잊혀진 기억 또는 '그땐 그랬지'라며 회상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피할 수없는 위기다. 2021년 새해가 밝은 만큼 우리가 코로나에서 벗어나려면 더욱 노력해야 한다. 개개인이 코로나 방역수칙을 지켜야지만 방역대책이 빛을 볼 수 있다. 코로나가 퍼지면 특정 집단을 욕하기보다는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를 고민하고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코로나가 끝나게 해달라"며 새해 소망을 빌기도 했을 것이다. 이들의 소원이 이뤄지려면 모두가 힘을 보태야 할 때다. 위기는 노력을 통해 벗어날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20의 정치, 2021의 정치
2020년 광주·전남의 중요한 정치적 이슈는 '민주당의 압승'이었다. 파란 물결은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을 뒤덮었다. 국회 300석 중 180석을 차지한 거대여당의 탄생이었다. 올해 광주전남의 국회의원들 중 상당수 의원이 초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합격점'을 받았다. 5·18역사왜곡처벌법, 아특법(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부터 운전면허시험장 광주 신설, 광주역 혁신지구 지정까지 지역의 주요 현안들이 속도를 밟아나가고 있다. 이는 초선의원들의 패기와 여당의 힘이 시너지를 낸 까닭이다. 여당의 승승장구에 정치적 민원도 여당에게 향한다. 정의당의 1호 법안인 중대재해법 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수신자는 여당이다. 국민의힘도 사실상 100석 넘는 의석수를 확보해 거대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은 갖췄다. 하지만 타협과 대화보단 정권 공격에 화력을 집중했다. 특히 최근엔 아특법 개정안을 놓고 '공무원 늘리기'라고 반발하며 '묻지마 반대'를 이어갔다. 아시아문화전당의 정상화를 위해서 이번 회기내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아특법 개정안은 전당 관계자들과 지역의 숙원이다. 국민의힘은 아시아문화원을 전당으로 일원화시키는 과정에서 문화원 직원이 공무원으로 전환된다고 반대했다. 법안을 발의한 이병훈 의원은 특혜성 전환이 아니고 "모든 직원이 시험을 봐야한다"고 항변했지만 국민의힘 의원들은 어떠한 정치적 타협을 진행하지 않고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이견을 조정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치는 꽃을 피운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묻지마 반대'와 '딴지 걸기'로 협상테이블을 걷어차고 있다. 앞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악의적 폄훼를 막는 5·18왜곡처벌법에 대해선 야당은 표현·학문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악법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5·18 북한개입설, 5·18 폭동과 같은 주장은 표현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았을까. 5·18을 지속적으로 날조해온 지만원씨가 '북한군 특수군'을 주장하면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졌다는 자부심을 가진 광주시민들과, 5·18유가족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구체적인 피해자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받았다. 현재까지도 지만원씨의 악의적 주장을 믿는 세력들이 지천에 있다. 그렇기에 5·18왜곡처벌법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이 아닌 더 이상의 왜곡을 막는 불가피한 고육책이다. 거대여당의 권력을 비판하고 견제해야 하는 야당이 맥락없는 딴지걸기에 사활을 걸어선 안된다. 야당이 타협을 통해 정국을 풀어나가길 바란다. 2021년도에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협상테이블에 끝까지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많이 당황하셨어요?
"공무원 아니고 '공무직 직원'입니다. 기사 쓰실 때 정확히 표현해주세요." 최근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는 '광주 서구 공무원 불법 주정차 과태료 면제 특혜'와 관련해 받은 전화 내용 중 일부다. 내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선 다급함이 느껴졌다. 빠르고 두서없이 뱉어내는 말을 이해하는 데엔 시간이 한참 걸렸다. 전화 내용은 "논란이 된 일은 모두 공무직 직원들이 벌인 것이니 기사에 '공무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지난 14일 광주 서구에서 불법 주정차 단속 업무를 하는 공무직 직원들이 단속 자료를 임의로 삭제해 지인 등에게 과태료 면제 혜택을 줘 파문이 일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서구는 지난 23일 기자회견을 열고 2018년부터 지난달 18일까지 3년여간 과태료 부정 면제와 관련한 자체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서구에 따르면 불법 주정차 과태료 처리 내용 중 140건의 과태료가 부당한 방법으로 무단 면제됐다. 직·간접적으로 과태료 면제를 요청한 이들 중에는 5급에서 9급까지의 공무원이 다수 포함됐다. 서구의회 의원 2명(3건), 5급 이상 과장급 공무원 8명(10건), 6급 이하 공무원 60명(82건), 공무직·기간제 노동자 16명(20건), 퇴직 공무원 14명(18건)으로 밝혀졌다. 총 110건이 전·현직 공무원의 단속 처리 내용이었다. 앞서 강조했던 '공무직 직원'의 면제 건은 140건 중 단 20건 뿐이었다. 이 같은 자체 감사 결과를 놓고 보면 기사에 '공무원'이라는 단어를 써도 무방할 듯하다. 잘못을 무마하기 급급했던 그들의 행태는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공직자로서 '청렴'의 본보기가 돼 시·구민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랄 판에 지적 기사가 나올까 노심초사 하는 모습에 기가 찰 노릇이다. 아울러 이번 서구의 감사 결과 발표는 지난 3년여간의 것이다. 좀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많은 이들이 연루돼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여론이 악화하자 갑자기 감사 결과를 내고 과태료를 재부과한다는 것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다. 단순히 사실을 숨기려고만 하지 말고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급한 불을 끄려다 오히려 불씨를 키우는 일은 없길 바란다.
'구례수해 피해' 정부 적극 나서라
밤의 길이가 일 년 중 가장 긴 동지(冬至)인 21일. 전국에는 여전히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벌써 일주일 넘께 이어진 한파이다. 그래도 한파를 이겨낼 따듯한 안식처와 늘 방겨줄 가족이 있기에 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8월 8일 수해피해를 입고 집과 터전을 잃은 수해피해 주민들에게 이런 평범한 일상은 사치일 뿐이다. 7평 남짓한 임시 조립주택에서 벌써 4개월째 머물고 있다. 방 곳곳에서 스며드는 한기를 이겨내며 겨울 한파를 이겨내야 할 이재민들에겐 희망마저 얼어붙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이재민을 위해 설치한 임시주택 마저 설계와 다른 규격 미달 자재를 사용하는 등 부실 시공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또 한번 상처를 안기기도 했다. 더욱 이재민을 분노케 한 건 더딘 보상 문제이다. 수해가 발생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정치인들이 다녀가면 금세 피해보상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달라진 것 없었다. 이미 해를 넘겼고 내년에도 보상이 이뤄질지도 난무하다. 더 나아가 이재민들이 주장하는 수해피해를 키운 섬진강댐 방류 주체인 한국수자원공사, 농어촌공사 등의 소극적인 대처도 문제이다. 구례를 중심으로 수해피해 주민들은 8월8일 오전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질 무렵 섬진강댐 사전 방류시기를 놓쳐 피해를 키웠다며 책임자를 고발하기 까지 했다. 믿음을 잃은 정부나 정치권, 정부기관에 대한 성난 민심이 표출된 셈이다. 이재민의 의견을 반영한 듯 지난 9월18일 댐관리위원회를 출범하고 수해피해조사가 본격화 될줄 알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삐걱됐다. 책임조사를 하게 될 댐관리위원회에 피해주민들이 배제되면서다. 이후 10월20일 피해주민이 참여한 댐 하류 수해원인조사협의회(이하 조사협의회)가 출범했다. 하지만 12월이 다 되도록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조사협의회 출범이후 고작 한 일이 '명칭 변경' 뿐이었다. 이번 수해는 과거 전례가 없는 이례적 천재지변에 가깝다. 책임소재를 묻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홍수 당시 섬진강댐 방류와의 직접적인 관련기관은 혹시나 처벌이 이뤄지지 않을까 몸을 사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하는 염려가 든다. 주민들은 그저 100%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책임 소재가 100% 인정돼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피하려는 옹졸한 모습보다는 힘겹게 한파를 이겨내고 있는 이재민을 돕기 위한 정부기관의 적극적인 자세가 절실히 요구된다.
코로나19와 시험 전야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1894년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시민 불복종'에서 한 말이다. 그가 남긴 명제는 공익과 사익의 관계,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에 대한 성찰을 던지고 있다. 하지만 2020년에도 공익은 종종 사익에 앞선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공익 우선시 현상을 더욱 당연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감염병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려는 방역당국의 노력을 '공익 우선주의'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 되레 답답하다며 마스크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시민들이야말로 '극단적 사익(여기선 邪益) 추구자'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국민 개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데서 민주주의는 꽃핀다. 정부는 코로나19 정국 초반 '국민 한 명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방역이라는 국가적 대의 속 배제되거나 희생되는 사람은 없는지 점검하겠다는 의지다. 그리고 지난 3일 전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진행됐다. 시험 당일 오전에도 확진 수험생이 생겨났지만, 병실 고사장 마련 등 철저한 방역과 배려 덕에 수험생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을 무사히 치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대학별 수시 고사가 시작됐다. "코로나19 확진자는 면접(논술)시험에 응시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막 긴 터널을 지난 확진 수험생은 막혀버린 길 앞에서 주저앉아야 했다. 교육부는 대학별 수시 고사를 앞두고 각 대학에 비대면 방식 전환 등으로 모든 수험생이 시험을 볼 수 있게 하라고 권고했다. 일부 대학들은 비대면 면접으로 전환하거나 시간대별 쪼개기 방식으로 수시 면접을 진행했다. 확진자용 별도 시험장도 따로 마련했다. 하지만 권고로만 받아들인 일부 대학은 대면 면접을 고수하며 확진 수험생의 시험 응시를 불허했다. 아예 격리 대상자의 응시를 막은 대학도 있었다. "시험 전에 해열제를 먹고 가도 될까요?", "확진 판정만 안받으면 되니까 밀접접촉자로 분류돼도 시험 끝날 때까지 코로나19 검사를 안하면 되겠죠?" 시험 전, 입시 커뮤니티는 '시험장에 무사히 들어가는 방법'과 관련된 글로 떠들썩했다. 1년에 한 번 뿐인 기회를 코로나19로 포기할 수 없었던 수험생들은 시험 전날에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확진자 시험 응시 불가' 문구 앞에서 수험생의 응시권은 힘없이 무너졌다. 남은 건 확진자에 대한 낙인과 "중요한 일 앞두고 몸관리 못한 본인 잘못"이라는 비난이었다. (무증상 감염자가 섞여 있을지도 모를) 캠퍼스 내 감염을 막기 위해 확진 수험생을 위한 격리 시험장소는 내어줄 수 없다는 일부 대학의 주장은 진정 공익을 위한 것일까. 내년에 있을 정시 면접에서는 모든 수험생들이 전날 밤 편히 잠들 수 있길 바란다.
'청렴 전남' 무색…1년만에 4등급 되돌아간 전남
전남도가 2020년도 공공기관 청렴도 측정에서 종합 4등급 평가를 받았다. 외부청렴도는 지난해 2등급에서 4등급으로 두 계단 추락했고 내부청렴도 역시 3등급에서 4등급으로 추락해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전남의 청렴도가 이처럼 추락한 것은 달라진 평가방식에 따른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사업추진과정에 금품 향응, 직권 남용, 편의 제공 등 부정부패가 여전해서다. 지난 2018년 해운 업무 관련 편의를 봐준 사례금으로 1100만 원을 받았던 사례가 등급 하락의 결정적 요인이 됐다. 전남도는 최근 10년 새 만년 '4등급'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줄곧 4등급을 받았고, 2016년 5등급으로 더 하락하더니 2017년과 2018년에 다시 내리 4등급을 받았다. 지난해 모처럼 2등급을 받으면서 기대를 키웠지만 불과 1년 만에 다시 4등급으로 주저앉았다. 최근 5년 새 3등급을 유지하던 내부 청렴도가 뒷걸음질 친 사례는 더욱 암담하다. 올해 내부 청렴도는 4등급으로 지난 2015년 이후 처음이다. 갑질문제, 불통논란 등 꽉 막힌 내부 소통 부족 현상이 내부 청렴도 하락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김영록 지사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청렴도 우수기관으로 도약했던 성과를 이어가지 못한 점에 대해 대단히 송구하게 생각한다"며 "금년도 평가시책을 잘 분석해서 부족한 점은 보안을 유지해나가고 올해 추진한 시책에 대해서도 객관적 평가를 통해 내실 있게 수립해 나가겠다"고 했다. 공식사회 청렴도는 지자체의 경쟁력 악화로 이어진다. 청렴도가 낮은 조직은 결국 병들게 마련이다. 전남도가 지금 바로 공직사회를 바로 세우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서 '목민심서'에는 청렴에 관한 글귀가 있다. "청렴함은 본연의 일로서 온갖 선의 근원이고 모든 덕의 근본이며, 청렴하지 않고서 목민관 노릇을 제대로 한 사람은 아직 없다." 300년 전 선인의 경고가 경종을 울리고 있다.
백신만으로는 코로나19를 박멸할 수 없다
2019년 11월17일, 코로나19가 세상에 처음 나와 전 세계를 팬데믹 공포에 떨게 한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코로나19는 지금껏 인간의 목숨과 건강을 위협해 온 수많은 질병과는 격이 달랐다. 사회를 마비시키는 것은 물론 '포스트 코로나'라는 전무후무한 패러다임을 전 세계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고 있다. 인류로 하여금 '제어하느냐, 제어당하느냐'의 기로에 서게 만든 범세계적 신드롬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는 모두가 백신 개발에 몰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코로나19 박멸을 고대하는 인류의 염원에 응답하듯 발병 1년 만에 화이자-바이오엔테크의 백신 'BNT162'가 개발됐다. 지난 2일 영국에 이어 4일 바레인에서 긴급사용이 승인돼 접종을 앞두고 있다. 한국도 12월 중순께 승인·유통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95%라는 높은 예방 효과를 보인 새로운 백신 개발 소식에 전 세계인의 관심은 자연히 집중됐다. 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코로나19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자라나자, 이는 곧 안일함으로 바뀌어 최근 재유행의 불씨가 됐다. 오랜 기간 사회적 거리두기와 생활방역에 지친 사람들은 백신 소식에 자세가 풀어졌다. 제주도를 비롯해 순천 등 전남 여행 명소는 발 디딜 틈이 없었고, 광주 시내와 상무지구의 술집과 유흥시설은 밤마다 문전성시를 이뤘다. 안일함의 대가는 부메랑이 돼 빠르고도 가혹하게 돌아왔다. 서울·경기에서는 하루에 수백명씩 확진자가 쏟아져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됐다. 광주도 연말까지 2단계가 연장됐으며, 전남도 그에 준하는 거리두기가 지속되고 있다. 국내 접종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백신 소식만으로 이미 박멸해버린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12월 접종이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전 국민이 주사를 맞을 때까지는 수개월이 걸린다. 더구나 아직 효과가 확증되지 않은 긴급사용 승인 상태이며, 알 수 없는 부작용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완전한 박멸을 선언하기 전까지 거리두기와 생활방역에 소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마라톤 42.195㎞ 완주의 성패는 마지막 7㎞ 구간을 어떻게 운영하는가에 달렸다고 한다. 다 끝났다고 자만하거나 흥분하는 순간 그동안 쌓아 올린 금자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백신은 예방제일 뿐, 완치제가 아니다. 1년을 버텨온 끈기를 자양분 삼아 유흥과 여가생활을 지양하고, 제대로 된 백신을 모두가 안전히 접종받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 완전한 집단면역이 형성되는 그 날, 비로소 마스크 없이도 자유롭게 거리로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박멸이 점차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자신이나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마지막 희생양으로 바칠 필요는 없잖은가.
이름 없는 죽음과 권력형 애도
올해의 기업인에 부자가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기사도 여전히 그를 가리킨다. 별세 한 달 후, 그가 세상에 남긴 말, 별세 49재 한 사찰서 조용히…. 따위의 것들이다. 그가 저지른 과오는 어느새 없어지고 세상은 그의 어록을 새기라고 했다. 시간을 조금 더 되돌려 보자. 전 서울시장의 소식에 진보 정치인이 애도를 표했다. 자신에게 엄격한 오랜 친구가 애석하다느니, 그만한 남자사람 친구를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느니…. 따위의 것들이다. 서울시가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도로 확장)에 착수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은 "전 서울시장도 사업을 중단하려 했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그는 죽음 이후에도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이 알아서 기억해주는 죽음도 있지만, 세상에 무언가 알리려고 하는 죽음도 있다. 올해는 전태일 50주년이라고 한다. 그가 죽음으로써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전태일이 죽고 50년 동안 얼마나 달라졌을까. 올해 택배노동자 15명이 과로사로 죽었다. 일하다가 죽었다는 말이다. 전태일의 죽음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 고 김재순씨는 홀로 목재 파쇄기 청소 작업을 하다 파쇄기에 끼어 숨졌다. 고 김재순씨는 매일 칼날 앞에서 일했다. 현장에는 파쇄기 투입구 덮개, 비상정지 리모컨 등 안전장치가 단 한 개도 없었다. 같은 현장에서 비슷한 사망사건은 앞서 2014년에도 있었지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없다. 당연하다는 듯 따라오는 애도와 추모없는 '이름 없는 죽음'이 언제 또 일어날 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나만이라도 권력형 애도 뒤로 숨어버린 이름 없는 노동자의 죽음을 기억해야 할 듯 하다. 1991년 부산에서 한 노동자는 팔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고 죽었다.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노동자는 이름도 없이 대체되는 기계가 아니며, 나 역시 노동자다.
단 한 가지 '변화'
지난해 3월 11일, '수습기자'라는 명찰을 붙이고 공식적으로 32년만에 광주를 찾았다는 전두환 씨를 광주지방법원에서 처음 마주했다.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지 10개월 만에 전씨가 참여한 첫 재판이었다. 전씨가 차에서 내리던 순간 담장을 넘어 달려들던 한 남성에게 왜 그랬냐고 묻자 대답 대신 토하는 울분에 함께 울었다. 창문을 열고 법원을 향해 "전두환은 사죄하라"고 외치던 초등학생들의 모습에 같이 웃었고, 주저앉는 어머니들에 함께 분노했다. 인간벽을 세운 경찰, 수많은 취재진과 시민들, 5·18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의 모습은 초임기자에겐 넘치게 벅찬 순간이었다. 그렇게 절대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그날의 긴장감은 시간 속에 무뎌졌다. 그 시간 속에서 전씨는 골프장 나들이를 떠났다.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며 호화 오찬을 즐기기도 했다. 지난 4월, 다시 한번 광주 법정에 섰지만, 침묵은 변함이 없었다. 법정안이 편안하였는지 여전히 잠도 잘 잤다. 그리고 지난달 30일. 무뎠던 시간은 잘도 흘러 이제는 수습 명찰 없이 법원 안에서 전씨를 마주했다. 차에서 내려 차분히 중절모를 고쳐 쓰고, 경호원의 거친 밀침에도 끝까지 "사과하지 않을거냐" 질문을 던진 취재진의 물음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이날 단 한 가지 변한 것은 그에게 '유죄'라는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정황과 증거, 검증으로 사실로 판명됐다. 하지만 헬기사격 사실에 대한 사법부의 인정은 충분히 큰 의미를 가진다. 지난달 진행된 전씨의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징역 1년6월을 구형하며 "판결로서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전씨에 징역 8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재판장은 선고 직전 "지금이라도 5·18의 가장 큰 책임 있는 피고인이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받길 바란다"는 한 마디로 이에 답했다. 이날의 변화는 마무리가 아닌 다시 시작함을 알리고 있다. 아직 가려진 것은 셀 수 없고 국가의 공권력에 스러진 수많은 시민들은 여전히 사과 한마디를 듣지 못했다. 5·18은 광주 지역에 국한된 아픔이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짊어져야 할 과제 중 하나다. 그리고 그 변화의 마지막 장에는 완벽한 진실 규명과 사죄가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것이다. 5·18 40주년을 맞은 2020년은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날의 선고로 미완의 진실 규명이 더욱 속도를 낼 것이라는 기대감의 실체를, 곧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란다.
폐업률 외면하는 경제부처
'풍요 속 빈곤'이라는 말이 있다.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생산설비를 완전히 가동하지 못함으로써 잠재적으로 실현 가능한 생산을 달성하지 못할 때, 그로 인한 빈곤을 '풍요 속 빈곤'이라 한다. 경제학에서 쓰는 용어인 이 말은 이제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상대적으로 정서가 메마르고 빈곤한 세태를 지칭하는 말이 되고 있다. 혹자는 현시대를 '풍요 속 빈곤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뒤바꾼 이후, 풍요로운 시대는 저물었고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불러올 경제 충격과 장기화된 경기침체에 대한 불안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질적으로도 빈곤의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한 셈이다. 이 같은 불안감으로 위축된 소비 심리에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이들은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던 자영업자들이었다. 그 어떤 준비도 없이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가게 문을 닫았다. 꼬리 물듯 이어진 그들의 줄폐업에 씁쓸한 호황을 누리는 이들도 있다. 바로 철거 전문 업체다. 동구의 한 철거 전문 업체는 지난해보다 2~3배 늘어난 철거 의뢰에 눈 깜빡일 새도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창업하는 이가 없어 나날이 쌓여가는 철거된 중고 물품들이 애물단지이기는 하지만,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래도 일터로 향하는 순간마다 마음만은 편치 않다. 철거하기 위해 찾은 카페 곳곳에 묻은 주인의 손때를 보고 있자면 지금의 '빈곤 속 풍요'에 맘 편히 웃을 수도 없다. 지난 24일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창업기업 동향'에 따르면 올해 3분기 창업기업은 34만3128개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3.3% 늘었다. 중기부의 경제지표에 따르면 숙박·음식점업도 10.9% 상승해 코로나19 자영업이 활기를 띠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중기부는 폐업 통계는 발표하지 않는다. 국세청, 통계청도 마찬가지다. 폐업은 창업처럼 바로 신고하지 않기 때문에 통계를 따로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수많은 자영업자가 눈물을 머금고 문을 닫은 카페, 식당의 수가 얼마나 되는 지 그 어떤 경제지표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폐업 통계 없이 창업 통계만으로 경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 어떤 경제 부처에서도 다루지 않는 폐업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철거업체를 찾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창업률만 줄줄이 나열된 자료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풍요 속 빈곤의 시대'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가슴
"휠체어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참 씁쓸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되죠. 장애인 복지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업무는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한 장애인협회장의 설움 섞인 하소연이자 지적이었다. 지난 1월 31일까지 시설주가 공공기관이면 장애인 등 일상생활에서 이동하거나 시설 이용·정보 접근 등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높이 차이가 있는 무대를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경사로 설치를 완료해야 했다. 이는 2018년 1월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개정·시행됨에 따른 것이다. 광주시의 대표 문화시설인 광주문화예술회관 관계자는 공연장 내에서 휠체어 이동이 필요하다면 무대 앞쪽에 바닥 높낮이를 없앨 수 있게끔 설치된 오케스트라 피트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휠체어를 고정할 수 있는 그 어떤 장비도 갖추지 않고서 하는 이 주장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안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다. 더욱이 '인권 도시'를 주장하는 광주시 장애인복지과는 경사로의 설치 의무 날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법률 시행에 따라 문예회관 등 시설의 법률 이행 여부를 관리·감독해야 하는 복지과에 '복지'는 없고 '말'만 있는 모양새다. 장애인 경사로 관련 취재를 위해 만난 취재원은 장애인 복지는 결국 '의지' 유무의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경기도의 경우 중증장애인 가구의 주거 편의를 위해 중증장애인 주택개조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법률 시행에 따른 의무화와는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일지 모른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공약사항이기는 하지만, 장애인을 배려하는 뜨거운 가슴에서 추진된 사업이 아니었을까. 광주시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든다고 하면서 정작 그들을 위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비장애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는 몇 계단이 장애인에게는 높은 장벽이라는 것은 장애인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지금보다 더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무대뿐만이 아닌 광주 전역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같은 위치의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길 기대한다.
지자체-환경부, 핑크뮬리 식재 규모도 엇박자
# "저희 군 확인 결과 현재 개인이 운영하고 있는 수목원으로 4000본의 핑크뮬리가 식재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 "저희 수목원에는 핑크뮬리가 총 1200본 식재 돼 있습니다." 지난달 중순 핑크뮬리가 생태계 교란종 2급으로 지정되면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을 당시 핑크뮬리의 식재량 취재 과정에서 나눈 대화다. 관공서 답변과 수목원 주인의 답변이 서로 달랐다.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추가적인 핑크뮬리 취재를 진행 중 정확한 온도 수치를 확인하기 위해 문의했으나 갈수록 가관이었다. 더 확인 차 환경부에 전화를 돌렸다. 이젠 잘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온도와 핑크뮬리 생존 연관성 자료에 따르면 핑크뮬리가 추운 온도에 취약해 겨울이 되면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입니다. 환경부 자체적 회의 결과 정확한 온도 수치는 공개할 수 없습니다." 현재 전남지역에 식재된 핑크뮬리 현황은 순천 국가정원 비오톱 습지 4000㎡에 3만6000본, 해남 현산면의 4est(포레스트) 수목원 1200본, 함평엑스포공원 지난해 5000본과 추가로 수변공원에 올해 1만본, 장성 황룡강변 핑크뮬리 정원 올해 10만본, 2018년 여수 선사유적공원 2만922본이 식재된 상태다. 기존 식재된 핑크뮬리에 대해선 환경부의 추가적 지침이 없어 생태계를 교란하는지 관찰만 해야 한다. 사소한 핑크뮬리 식재현황에 대한 답변이 다르다는 점과 정확한 자료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핑크뮬리가 생태계만 교란시키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인체에 유해한 것으로 확인됐는데 수치 파악 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상황이다면 어떻게 됐을까 핑크뮬리 식재 수치가 뭐 그리 큰 문제인가 생각할 수도 있다. 지자체와 환경부가 그들이 말하는 숫자 하나에도 행정력을 집중해 파악해야 한다. 만약 그들의 말처럼 인구주택조사에서 인구수를 잘못 파악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행정기관에서는 본래 취지처럼 정확한 수치 파악을 통한 정보제공에 관심을 기울여주기 바란다.
국민의힘, 호남 지지율이 여전히 한 자릿수인 이유
'서진(西進) 전략', '호남 끌어안기', '호남 구애', '호남 동행' 현 제1야당인 국민의힘이 호남권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돌입한 '작전명'이다. 내년 서울시장 선거를 위해선 호남 출신 인구 비율이 15%에 육박하는 서울권 일부 표심을 잡기 위한 전략이자 호남지역에 단 한 석도 국회의원 수를 챙기지 못한 위기의식이 기저에 있다. 국민의힘은 8월 5·18민주묘지 추모탑 앞에서 사죄했으며 11월엔 '호남 동행'이란 이름으로 광주·전남지역 기초단체장과 만나 지역 현안을 청취했다. 비슷한 시기에 광주 심장부인 시청 앞에는 "국민의힘 광주 제2지역구 국회의원 인사 올립니다"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실존하진 않는 '제2지역구'에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배치됐다. 호남 지자체 현안을 챙기겠다는 의도로 꽤 눈길을 끄는 정치적 마케팅이란 평가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서진 전략을 추진하며 "역사의 매듭을 풀고 미래를 나아가기 위한 시작"이라고 말했다. 보수 정당이 호남을 끌어안으며 역사적 사명감을 갖는 건 바람직하다. 지금껏 정치권이 '지역 감정'을 악용해 정치적 실리를 챙긴 것과 대비되는 의미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국민의힘 서진 전략은 지역의 정치적 편차를 여전히 확인시켜준 계기가 됐다. 국민의힘이 서진 전략을 펼치고 있을 때 보수 텃밭인 TK에선 국민의힘 지지도가 오히려 하락했다. 최근 한국 갤럽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TK내부 정당 지지율은 더불어민주당(34%)에 못 미치는 30%라는 결과가 나왔다. 지난 설문조사까지 TK에서 민주당 지지도가 더 높게 나온 것은 김 위원장 취임 직후인 6월 이후 약 5개월 만이다. 그렇다고 국민의힘이 호남 민심을 얻은 것도 아니다. 올해 1월초 한국 갤럽 정당 지지도를 보면 호남권에선 자유한국당이 4%대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러다 지난 9월, 해당 지표에서 8%대까지 올랐다. 그러나 '호남 동행' 의원들이 광주를 찾아 현안을 살폈음에도 불구하고 11월의 설문조사에선 다시 2%대로 뚝 떨어졌다. 최근 보수정당 출신인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광주에 방문했었다. 기자들 사이에선 "왜"라는 물음이 많았다. 광주를 찾는 보수 출신 정치인사들이 많아지면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기자들도 이런 모습이 생경하다. 광주 시민들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왔다가 돌아가기만 해서는 호남 민심을 붙잡기 힘들다. 보수 출신 정치인사들이 왔을 때마다 광주는 5·18민주화운동, 군 공항 이전 관련 특별법 등 지역의 주요 현안들에 대한 관심을 부탁했다. 국민의힘이 호남의 부탁에 부응할 때 국민의힘이 한 자릿수 지지율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지역민들 피부에 와닿는 정책발굴을 위해서 좀 더 진정성 있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코로나 수능과 호흡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여주인공 샤오위는 천식을 앓다 세상을 떠난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대만 영화만의 감성 덕에 샤오위는 풋풋한 첫사랑의 이미지로 대중에 기억된다. 하지만 코로나19 현실에서 천식 환자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하는 처지다. 잦은 기침이라도 내뱉으면 "코로나19 감염자 아니야?"라는 의심부터 받고, 장시간 마스크 착용으로 호흡 곤란을 겪기도 한다. 천식(asthma)은 그리스어의 '날카로운 호흡'에서 유래했다. 기도 폐쇄로 호흡 곤란, 기침 등이 발생하며, 공기가 차고 건조한 겨울에 증상이 더 심해진다. 완치가 어려워 악화되지 않도록 평상시 관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달 3일 치러지는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천식이 있는 수험생들은 '기타 시험편의 제공 대상자'로 인정된다. 이들은 별도의 시험장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혼자 시험을 치를 수 있다. '코로나 수능'에서 마스크 착용은 의무사항이지만, 천식 등 호흡기 환자는 마스크 착용으로 질환 악화가 염려되는 탓이다. 교육부의 이같은 발표에 일부 누리꾼들은 '불공정한 특혜'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해당 기사에는 '마스크 착용으로 호흡곤란이 있다는 사실만 증빙하면 나도 마스크 없이 따로 시험 볼 수 있느냐'는 조롱섞인 댓글도 달렸다. 취재현장에서 만난 고3 학생은 마스크 착용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수학이나 과학탐구 같이 복잡한 계산 문제를 풀 때는 집중을 해야 돼 순간 몸에 열이 올라요. 마스크를 쓰면 호흡도 가빠지고 어지러워서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신체 건강한, 최상위권 수험생에게도 마스크를 쓰고 제한 시간 내 문제를 푸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코로나 시대에도 수능은 인생에서 가장 무게감 있는 시험이다. 수능일은 출근시간도 늦추고, 비행기도 날지 못하게 할 만큼 대한민국 전체가 수험생 못지않게 예민해지는 날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 내달 3일 또다시 펼쳐지게 된다. 수능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수험생들은 마스크 한 장에도 크게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천식 환자 특혜' 발상은 여기서 나온다. 마스크 한 장이 누군가에게는 불편의 문제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문제임을 받아들일 여유조차 남아있지 않은 셈이다. 한 수험생의 '날카로운 신경'은 다른 수험생의 '날카로운 호흡'을 아프게 찔렀다. 마스크 착용의 답답함에 익숙해지고 있는 요즘, 다시 마스크를 벗는 시대를 상상해 본다. 수능철만 되면 뾰족해지는 신경이 그때는 무뎌질 수 있을까.
국민의힘 호남동행에는 진정성이 담겼나
야당의 행보가 심상찮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3일 또 전남을 찾았다. 지난 8월 광주 북구 5·18 민주묘지에서 '무릎 사과'를 한 지 두 달 만이다. 당시 그는 "부디 이렇게 용서를 구한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고 울먹였다. 김 위원장은 또 "5월 정신을 훼손하는 일부 사람들 발언에 우리 당이 회초리를 들지 못했다. 잘못된 언행에 당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진실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거듭 고개를 숙였다. 야당 파격 행보는 계속 이어졌다. 지난 10월 27일 호남 예산을 챙기겠다며 주호영 원내대표가 광주에 내려와 예산정책협의회를 열었고, 지난 3일에는 아예 전 시‧군 단체장으로부터 현안 사업을 청취했다. 야당 대표가 5‧18 민주묘지를 방문해 '무릎 사과'를 한 것도, 예산을 챙기겠다며 직접 찾아와 목소리를 듣는 것도 모두 전례 없는 일이다. 이는 호남 및 중도층 민심을 겨냥한 포석으로 읽힌다. '호남을 잡아야 선거를 잡는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내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이어 내후년 대선까지 수도권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호남의 표를 잡아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지역민들은 '전략적인 선택'이라고 풀이하면서도 '환영할만한 일'이라며 주목하고 있다. 그간 사사건건 발목이 잡혀 왔던 지역 현안 해결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정치권이 부추겼던 지역주의 극복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차기 정국에서는 결국 고정 지지기반이나 이념 프레임 논쟁이 아닌 정정당당한 공약 선거도 가능해진다는 낙관론도 나온다. 그러나 동시에 지역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다. 5·18 역사 왜곡 처벌법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 데다 선거를 앞두고 보여주기식 행보가 아니냐는 우려때문이다. 광주시민단체협의회는 '김종인 광주방문 관련 성명'을 내고 "더 이상 정치적 쇼로 호남 민심과 5·18을 우롱하지 말고 약속한 대로 당론과 법안 통과로 진정성을 입증하라"고 촉구했다. 5·18 이후 40년이 지났다. 야당의 행보는 바람직한 신호지만 냉랭한 지역 민심에 불을 지피기에는 아직 턱없이 모자라다. 호남 동행이 진정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단순한 '공수표 남발'로 끝나선 안 된다는 말이다.
집중호우 피해 100일, 선각후망 경계해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중대하든 하지 않든 간에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바랜다. 사회적으로 매우 심각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교육이나 심리·상담을 공부한 적이 있다면 한 번쯤 헤르만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 1850~1909)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기억·학습 연구의 선구자로서, '망각(忘却)'이라는 단어가 학문적·실용적으로 사용될 수 있게 만든 학자이다. 대표적인 연구 업적으로는 '망각곡선'을 들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의 망각 정도를 그래프화한 것으로, 사람은 학습 후 20분이 지났을 때 전체의 42% 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하루 뒤에는 3분의 1, 한 달 후에는 5분의 1만 남는다. 하물며 100여 일이 지난 지금은 과연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지난 7~8월 전국에서 수많은 인명·재산 손실을 일으켰던 사상 초유의 집중호우 수해 역시 망각곡선의 기울기처럼 국민의 뇌리에서 희미해지고 있다. 뜨겁게 달궈진 쇠가 금방 식듯, 사람들은 금세 코로나19와 정치 이슈 등에 치여 지난 여름의 악몽을 망각하고 있다. 여지껏 복구 작업조차 진행되지 않고 있는 곳도 수두룩한데 말이다. 망각은 닥쳐올 고난을 예방하는 데도 걸림돌이 된다. 자연재해를 사전에 국민에게 알려 피해를 예방하는 민방위경보시스템의 부실 역시 닥쳐올 제2의 수해와 무관하지 않다. 2019년 말 기준 전국의 경보가청률(일정 면적 당 경보를 들을 수 있는 사람 수를 수치화한 것)은 83.8%로, 숫자로만 보면 낮은 수치는 아니다. 그러나 이면에는 허수가 존재한다.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고 경보시스템도 잘 갖춰진 서울·경기 등 광역시·도, 대도시 인구밀집지역의 가청률은 90%를 상회한다. 지방의 낮은 가청률을 가려 '열악함'을 '그럴듯함'으로 둔갑시키는 장본인이다. 전남의 평균 가청률은 67.3%로, 시·군 단위로 보면 더욱 암담하다. 광양 99%, 순천·목포 96%, 여수 83% 등 일부 도시를 제외하면 절반이 채 안되는 곳이 허다하다. 최대 수해지인 구례·곡성도 30%대, 함평·신안은 10%대에 그쳤다. 국민의 망각과 무관심에서 기인한 안전불감증은 부실한 시스템보다 극악한 독으로 작용한다. 보통 사람에게 민방위경보사이렌은 귀찮고 시끄러운 소리일 뿐이다. 전남에서는 "별 일도 없는데 민방위 훈련일이나 기념일이라고 쓸데없이 틀어댄다"며 소음 민원을 넣는 이들도 적잖다. 강원도는 전혀 다르다. 지리적 특성으로 사계절 내내 산불과 폭설 등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는 곳이라 심심치 않게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진다. 주민들은 오히려 겨울이 되면 "왜 폭설이 내리기 전에 더 빨리 경보를 울리지 않느냐"며 항의하기도 한다. 에빙하우스는 망각을 예방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반복 학습'을 들었다. 올여름 비싼 값을 치르고 자연재해의 무서움을 경험한 광주·전남은 예방 안전 시스템 확립에 심혈을 기울이고, 망각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지난 수해를 곱씹어야 한다. 100년 만의 홍수라고 했던가, 앞으로 100년 후까지 아무 일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참혹한 대형사고가 발생해도 예방 없이 복구만 하다가는 '선각후망(先覺後忘, 앞에선 깨우치고 돌아서면 잊는다)'의 반복일 뿐이다. 국민이 나서서 사회에 뿌리깊은 안전불감증을 타파하고 대비 태세를 습관화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비가 올 때마다 물이 새는 초가지붕에 짚만 더할 것이 아니라, 비가 오기 전에 지붕을 들어내고 기와를 덮는 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