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추자도 조기축제에서 풍어제 주관하는 송순단 무녀 판소리란 작명은 언제 어디서 누가 한 것일까? 판소리의 생성은 영조 30년(1754) 유진한이 지은 춘향가를 기점으로 잡는다. 250여 년, 당시 이 노래가 존재했었으니 더 올려잡아 300년 남짓 된 셈이다. 하지만 이때부터 지금의 호명인 '판소리'가 있었던 게 아니다. 타령, 창(唱), 잡가(雜歌), 소리, 광대소리, 창악(唱樂), 극가(劇歌), 가곡(歌曲), 창극조(唱劇調)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이 중에서 어떤 이름이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판소리라는 명칭이 나타난 것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1940년 조선일보 출판)이다. 올려잡아도 100여 년 밖에 안된다. 더구나 판소리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다. 정노식이 왜 '조선판소리사'라고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보라. 판소리 만정(김...
편집에디터2022.09.22 16:31바오다이의 여름별장 외관. 차노휘 유럽의 집과 건물을 자세히 보면 창 모양이 다르다. 한국의 창문 형태가 가로가 길고 세로가 짧다면 유럽은 가로가 짧고 세로가 길다. 창 하나의 크기도 작을뿐더러 건축 면적에 비해 창문 개수도 적다. 유럽은 건축 자재가 돌과 벽돌이 주재료이다. 이 단단한 벽이 지붕을 떠받치는 형태이다. 벽 중심의 건축물은 가로로 널찍하게 창을 내면 벽돌의 하중을 견디기가 어렵다. 그래서 창의 가로 폭을 줄이고 대신 세로로 길쭉한 창을 내게 된다. 뿐만 이런 형태의 창문 모양은 세금 때문이기도 했다. 그 당시 영국은 세금을 걷기 위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그 중 하나가 '창문세'이다. 18세기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앙숙인 영국이 창문세를 거둬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게 꽤나 부러웠다. 그는 창문세를 도입하되 창문의 개수를 기준으로 하는 영국과 달리 창문 ...
편집에디터2022.09.22 16:29강항 동상. 내산서원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 성회를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자는 것이오,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라남도 도민 아니, 우리나라 대한민국 모든 민족이 온누리에 횃불을 밝히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민족민주화성회 때, 박관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의 연설이다. 말 그대로 열변을 토한 사자후였다. 광주시민의 심금을 울린 그는 이 집회를 이끌면서 '광주의 아들'로 거듭났다. 박관현동상. 그의 태 자리에서 가까운 불갑테마공원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박관현(1953∼1982)은 영광군 불갑면 쌍...
편집에디터2022.09.22 16:33이광사 문화거리에 설치된 '서결' 기념물 동국진체의 완성자, 이광사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의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 글씨는 추사 김정희와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1세기 정도 후대의 인물인 추사가 1840년 제주도로 귀양가던 중 초의선사를 찾아 대흥사에 들른다. 그리고 원교가 쓴 '대웅보전'의 현판을 보고 촌스럽다고 깎아내리면서 떼어내고 자신의 글씨로 대신하게 한다. 조선적인 조형성을 추구한 동국진체에 대해 추사는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 유배가 풀려 8년 만에 다시 대흥사를 찾은 추사는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찾아 걸도록 했다. 중국 중심의 전통 서법을 추구했던 추사도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의 진가를 인정한 것이다. 이광사는 김정희의 마음을 미리 예견했는지 "마음의 바탕이 밝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학식의 도량이 ...
편집에디터2022.09.15 13:58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무안학 심포지움을 열었다. 무안군 후원 무안문화원 주최 프로그램이다. 우후죽순 지방학이 생겨나는 와중에 아마도 꼴찌로 이름을 올린 게 아닌가 싶다. 내가 2년여 두 번의 기획과 섭외 등을 맡아 진행해서가 아니라, 향후 지역학을 고민하고 구성해나갈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페이스북에 간략한 성과를 공유하였고, 오프라인의 독자들을 위해 다시 풀어쓰는 셈이다. 그동안 몇 차례 무안학이라는 이름으로 발표와 토론이 있었지만 등 지역연구의 맥락을 넘어서는 지역학 화두를 내걸었다. 무안문화원 이...
편집에디터2022.09.15 17:10압록강을 건너고, 구련성에서 호랑이를 쫒다가 책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청나라에 들어서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사신단의 먹을거리와 잠자리는 청나라쪽에서 제공한다. 멀리서도 우뚝솟은 것이 바로 봉황산이다. 여기서 연암 박지원은 기운이 힘차보이기는 하나 밝고 윤택한 기운은 한양의 도봉산이나 삼각산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정말 그런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가 고구려 최고의 요새였던 봉황산성이 잃어버린 안시성을 생각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곳이다. 800m 높이의 봉황산과 고려성자산의 산새가 자연 성벽이고, 그 사이의 좁은 남문과 북문만...
편집에디터2022.09.15 15:461971년 미국의 미술잡지 Artnews 1월호에 실린 에세이에는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 "왜 지금까지 위대한 여성 예술가가 없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당시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사실 50여년이 흐른...) 지금도 미술사의 주 이론으로 적용되던 사고들은 현대 미술사에 권력으로 독점한 백인 남성들의 성차별적인 구조 뿐 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로확장되어 사회적 이슈의 숙제로 남아있다. 노클린은 '예술이란 오로지 천재적 재능을 지닌 한 개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발생 한다.' 는 점을 지적했다. 여성 천재 미술가가 탄생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 환경과 교육제도 때문이라는 것이 질문의 주요 관점이었다. 이후 '페미니즘feminism' 미술...
편집에디터2022.09.04 17:20죽림사원. 차노휘 베트남 사람들 70%가 불교신자이다. 그 뒤를 가톨릭(20%), 까오다이교(5%) 그리고 민간 토속신앙이 잇는다. 다소 생소한 까오다이교는 20세기 초에 생긴 베트남에서만 볼 수 있는 신생종교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듯 불교, 가톨릭, 도교, 유교, 이슬람 다섯 신을 모신다. '높은 곳을 보게 되(높은 곳을 가게 되)면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데, '까오다이(高台)' 또한 '높은 곳'이라는 의미로 신이 있는 곳 즉, '천국'을 가리킨다. 인류구원의 날에 천안이 나타난다고 믿는데 '천안(天眼)'은 지구본처럼 생긴 둥근 '눈'이며 이 종교의 심벌마크이다. 불교 또한 지난한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수난을 겪었다. 대표적으로 '틱꽝득(석광덕, 1897~1963)' 스님의 소신공양을 들 수 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부처에게 공양...
편집에디터2022.09.01 16:32영화 왕의 남자 광대들의 연희장면. 맥스무비에서 캡쳐 "근데 그때는 뭐, 광대 뭐, 딴따라 뭐, 이럴 때지(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4)." "그러니까 떠돌이들은, 유랑극을 하는 사람들은 조심을 해야된다. 이래가 부모들이 말렸어요(한국영화사연구소, 2010)." "영화 한다고 그러께네 뭐 뭐 기생 사람 된다카고 뭐. 그때 영화라는 게 인정도 안 했지, 그래께 내가 몰래 나왔지(한국영화사연구소, 2007)." "어어, 그리니까 완고하지요. 그니까 풍각쟁이한테 누가 딸을 주겠느냐(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5)." "아, 보나 마나 그런 딴따라니까, 이혼했지(한국영화사연구소, 2009)." 이승연의 '서사를 통해서 본 1950~60년대 대중문화 예술인의 정체성-예술관과 직업관을 중심으로(인문사회 21)'라는 글의 인용문들이다. 광대, 딴따라, 떠돌이, 풍각쟁이는 물론이요, 각설이, ...
편집에디터2022.09.01 16:24법화마을 표지석.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장성에선 인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벌교에 가면 주먹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말이다. 나름 고개가 끄덕여진다. 바다가 넓은 여수는 고기잡이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다. 장성은 학덕 높은 하서 김인후와 고봉 기대승, 노사 기정진의 영향이 크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벌교는 주먹과 무슨 상관이 있지? '벌교 주먹'에는 왠지 좋지 않은 이미지가 앞선다. 벌교에 폭력을 쓰며 행패를 부리는 깡패가 많았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말이나 행동이 거친 왈패가 많았을까? 궁금증이 에서 풀린다. 일제강점기 의병들의 투쟁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벌교주민(한만호, 손공현)의 구술이었다. '장터에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다가 보니께. 일본 헌병들이 조선사람 장사...
편집에디터2022.09.01 16:292001년 진도 소포마을 상가에서 열린, 고 정숙자의 씻김굿 중 손님굿. 이윤선 "경상도는 대풀이요/ 전라도는 중천의 풀이란다/ 잔도 잔도 새로 속잎이 났네/에라 만수야 에라 대신이야/ 많이 흠향하고 평안히 돌아가소서" 진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도 씻김굿의 대표적인 마무리곡이다. 시나위나 굿거리 연주를 하다가 당골 혹은 음악의 리더격인 누군가가 이 노래를 꺼내면 모두 합창하며 해당 거리를 끝내게 된다. 이 곡을 꼭 집어 이름을 붙인 예는 없다. 어떤 굿거리를 마무리하는 곡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나는 '갈무리조'란 이름을 쓴다. '갈무리'는 일을 처리하여 마무리한다는 뜻의 순우리말이고 '조(調)'는 시가나 노래의 음수에 의한 리듬 단위라는 의미로 차용한 것이다. 부언하자면 하나의 굿판을 이루는 십수 개의 하위 굿거리들이 있다. 대개 열두 개 정도로 구성된다. 그 중 중요한 하위 굿...
편집에디터2022.08.25 16:15압록강을 바라보고 있다. 연암 박지원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의주의 통군정에서 압록강을 바라보면서《열하일기》를 시작하고 있지만, 나는 지금 강 건너 중국쪽에서 압록강을 바라보면서 시작한다. 시대의 차이는 있다지만 같은 강이다. 그러나 바라보는 연암과 나, 두 사람의 심정은 다를 것이다. 그리운 땅을 눈앞에 두고도 갈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것이 나라면, 연암은 눈 앞에 펼쳐지는 드넓은 땅을 바라보며 새로운 것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감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 나는 중국 쪽 호산장성에 올라 망원렌즈로 통군정을 찾아보다가 유람선을...
편집에디터2022.08.25 16:15심적암 의병 위령탑(대흥사 입구) 심적암 전투지 안내판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 체포된 호남 의병장들(윗줄 맨 왼쪽이 황두일) 심적암 현장의 우물터 황준성(黃俊聖, 1879~1910)은 대한제국 국군의 참령(參領)이었다. 국권 피탈 과정에서 이루어진 군대 해산에 반대한 후 완도와 해남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다 순국한 인물이다. 참령은 계급 체계상 현재의 소령에 해당되지만, 당시는 대대장으로 3품 품계였고, 장군으로 불렸다. 지금의 소령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 군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의 황궁과 황실을 지켰던 박승환 시위대 1연대 1대대장이 군대 해산에 반대하고 자결하였는데, 당시 계급이 참령이었다. 참령 이상으로 의병장이 된 분은 만주에서 활동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와 황준성, 두 사람뿐이다. 이동휘는 군대 해산 당시 참령으로 강화진위대...
편집에디터2022.08.24 15:14"해모수와 사통한 뒤 버림받은 유화를 이상하게 여긴 동부여의 왕 금와가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 햇빛(日光)이 비추니 몸을 이끌어 이를 피하고 해그늘(日影)이 좇아와 비추니 받아들여 이로 인해 잉태했고 하나의 알을 낳았다." '삼국유사' 「고구려조」 주몽 탄생 기사를 김지하가 인용한 대목이다. 흰그늘이란 작명의 출처를 엿보게 해준다. 이렇게 설명한다. "햇빛(日光)과 해그늘(日影)이 분명히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병도는 각각 '햇빛'으로 번역했으니 '해그늘' 곧 흰 '그늘'의 깊고 무궁한 신화적, 신비적, 미학적 의미, 그 창조적 ...
편집에디터2022.08.18 16:56탑동마을 전경. 영랑생가 뒤편 세계모란공원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이돈삼 이 새끼, 저 새끼, 내부총질 등 비속어가 일상으로 들려온다. 정제되지 않은 저급한 언어들이 정치권에서 난무한다. 말의 품격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옛말에 '벼슬이 높은 1품은 아홉 번 생각한 다음 한마디 말을 하고, 9품은 한번 생각하고 아홉 마디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정치인들은 한번 생각하고, 아홉 마디 이상의 말을 뱉어내고 행동하는 것만 같다. 우리말을 잘 다듬어 쓴 '언어의 정원사'를 만나러 간다. 언어의 정원사는 내면의 서정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 영랑 김윤식(1903∼1950)을 가리킨다. 목적지는 '남도답사 일번지' 전라남도 강진이다. 강진은 김종률․정권수․박미희 트리오가 부른 '영랑과 강진'의 노랫말처럼, 영랑의 글이 음악이 되어 흐르는 곳이다. 감성길로 단장된 탑동마을의 골목길...
편집에디터2022.08.18 1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