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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일 전라도 대표, 일강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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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일 전라도 대표, 일강 김철

함평 신광 출생, 일본서 수학후 독립운동 투신
1919년 임정 수립 위해 초대 임시의정원 구성
의정원 29명 중 전라도 대표로 김철 선생 선출
가산정리 독립자금 마련, 안창호·김구 등과 활동
1934년 임시정부 활동중 급성 폐렴으로 숨져
함평 신광면에 임정청사·사당·기념관·묘지 조성

게재 2020-06-30 17:17:51
선생의 탯자리인 함평 신광면 구봉마을에 복원된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와 김철 선생 동상. 이돈삼 여행전문시민기자(전남도 대변인실) 제공
선생의 탯자리인 함평 신광면 구봉마을에 복원된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와 김철 선생 동상. 이돈삼 여행전문시민기자(전남도 대변인실) 제공
김철 선생을 모신 사당-구봉사
김철 선생을 모신 사당-구봉사
1919년 임정을 수립하고 초기 정부활동을 지휘한 국무원들과 함께 한 김철 선생(뒷줄 맨왼쪽).
1919년 임정을 수립하고 초기 정부활동을 지휘한 국무원들과 함께 한 김철 선생(뒷줄 맨왼쪽).
김철 선생 숭모비
김철 선생 숭모비
구봉사에 모셔져 있는 김철 선생의 영정.
구봉사에 모셔져 있는 김철 선생의 영정.

전라도 대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다

나비 축제로 유명한 함평에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건립되어 있다. 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함평에 건립되어 있을까?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초대 임시의정원이 구성된다. 임시의정원 29명 중 전라도 대표로는 유일하게 함평 출신의 김철이 선출된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일강 김철, 그는 평생을 임시정부와 함께한 전남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김철이 태어나고 자란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 그의 사당·기념관과 함께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건립된 이유다. 전라도 유일의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된 김철이 어떤 분인지는 1931년 6월 6일자 조선일보의 김철 관련 기사가 도움이 된다.

"'십여 년간 해외 풍상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지'라고 상하이 파견 전무길 기자가 묻자, 그는 '뭘요. 해내·외 할 것이 있습니까. 피차일반이지요'라고 답한다. 기자는 그를 '훨씬한 체구에 사색적으로 깨끗하게 생긴' '언제나 친절하고 성의 있는 분'이라고 쓰고 있다." 멋쟁이 김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김철이 어떤 분인지 더 궁금해진다.

임시의정원의 유일한 전라도 대표 일강(一江) 김철(金澈, 1886~1934), 그는 1886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9번지에서 부친 김동진과 모친 전주이씨의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난다. 1908년 영광의 광흥학교(光興學校)에 입학하여 중학 과정을 마치고, 1912년 경성의 법부(法部) 법관양성소인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메이지 대학에 진학한다.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 노비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낸 일이었다.

일제가 식민 통치에 협력하라는 회유와 협박을 하자 김철은 1917년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기 위해 식민지 망명객들의 기지였던 상하이(上海)로 망명한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철은 1918년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곧바로 여운형, 장덕수, 선우혁, 조동오, 한진교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한다.

김철은 신한청년당의 부주무로 기관지 「신한청년」을 발간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보냈고, 김철은 국내로 잠입하여 천석꾼의 가산을 처분하여 독립 자금 1만원을 마련한다. 한편, 천도교 교주이던 손병희를 만나 3만원의 독립 자금 지원을 약속받고 3·1거사를 협의한 후 상하이로 되돌아온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신한청년당원들과 함께 상해시 보창로 프랑스 조계지 내에 모여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작업에 참여한다. 그리고 1919년 4월 10일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전라도 대표 자격으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된다. 임시정부에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다

김철은 1919년 4월 30일 열린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8월에는 초대 교통차장에 임명된다. 총장 내정자였던 문창범이 취임하지 않자, 총장직까지 겸하게 된다. 교통국은 국내와의 연락, 정보 수집, 국내 동포와 일제의 동향을 파악 보고함으로써 임정의 활동 방침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부서였다.

1920년 1월, 김구 등과 함께 의용단(義勇團)을 발기한 후 산하 선전위원회 위원장인 안창호를 도와 선전업무에 종사하기도 했다. 1922년, 임시정부의 진로를 협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을 때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만들어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 간의 갈등 해결에 기여하기도 했다.

1924년 5월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1926년 12월 김구(국무령) 내각 국무위원에 임명되었고, 1927년 8월에는 이동녕 내각에서 군무장에 임명된다. 군무장은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장관에 해당된다. 1930년 12월, 김철은 다시 군무장에 재임용된다.

이때 김구는 재무장, 삼균주의의 주창자 조소앙은 외무장이었다. 군무장이었던 김철은 임정의 무장활동을 관장하면서 김구가 조직한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여 활동을 지원한다. 김철 등의 지원으로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는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서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그해 4월 윤봉길은 상하이 홍코우 공원에서 상하이 주둔 일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대장을 폭사시키는 의거를 실행한다. 이 두 의거는 침체에 빠져 있던 임정의 독립운동에 큰 활력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제의 추격이 급박해지자 김구와 함께 미국인 피치 목사의 집에 잠시 머무른 후 항저우(抗州)로 피신, 항저우 청태(淸泰) 제2여사(第二旅社) 32호실에 머무른다. 이어 1932년 5월, 항저우에 당도한 임정 간부들은 김철의 거처에 임시정부판공처(臨時政府判公處)를 개설하고 국무회의를 개최하여 재무장에 김철, 군무장에 김구를 임명한다. 김철과 김구의 역할을 서로 바꾼 것이다. 1934년 1월 양기탁 내각하에서 무임소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에는 국무원 비서장에 선출된다. 국무원 비서장은 임시정부 마지막 직책이었다.

일강 김철은 마지막 순간까지 임시정부를 붙잡고 조국 광복을 위해 분골쇄신한 남도 최고의 독립운동가였다.

항저우의 공원묘지에 묻히다

1934년, 임시정부에서 동분서주하던 그가 갑자기 급성 폐렴으로 쓰러져 항저우의 광자병원(廣慈病院)에서 숨을 거둔다. 1934년 6월 29일, 그의 나이 48세였다. 유족으로는 상하이에서 혼인한 최혜순과 미경·혜경 두 딸이 있다. 김철의 장례식은 양기탁, 이시영, 조완구 등 임정 요인들의 애도 속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장(葬)'으로 치러지고 남송의 충신인 악비의 사당인 악비묘(岳飛廟) 뒷산의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묻힌다. 그러나 지금 공동묘지는 아파트 단지로 변해 묘소의 위치마저 확인할 수 없다. 묘소를 찾지 못한 고향 사람들은 구봉산 기슭에 세운 숭모비 아래에 아파트 단지 흙을 가져와 합토(合土)했다. 혼을 가져온 셈이다.

김철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에 바쳤다. 그의 독립에 대한 열의는 1921년 1월 1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다음 글로 요약된다. "神斧鬼誅春秋大義 日昇月恆 河山重整" 해석하면 이렇다. "신의 도끼로 귀신을 주살하는 것이 춘추의 대의다. 해가 뜨고 달이 두루 비치니 강과 산이 모두 정연하다." 도끼로 주살하려던 '귀신'이 일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김철의 영향을 받아 그의 조카 김석과 사촌 아우 김덕근이 또 상하이를 찾는다. 김석은 다시 귀국하여 독립 자금을 모집하다 1928년 체포되어 2년간 수감 된다. 석방 후 다시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933년 다시 체포된 후 국내로 압송되어 5년의 옥고를 치른다. 특히 김석은 광복 이후 광주청년단장과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치안대장을 맡기도 했다. 정부는 1968년 김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1990년 김덕근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것을 바친 일강 김철, 그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고, 그의 고향 구봉산 기슭에 숭모비와 동상을 건립한다. 그리고 2003년 6월,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이 문을 연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독립역사관과 함께였다.

김씨 부인이 목을 맨 단심송과 김철 선생의 묘
김씨 부인이 목을 맨 단심송과 김철 선생의 묘

김철, 생가를 찾다

함평에서 영광으로 가는 23번 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좌측에 일강 김철기념관 표지판이 보인다. 김철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이다. 구봉마을 표지석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표지석도 서 있다.

일강 김철 선생 생가터는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임시정부청사 및 안중근 동상이 있는 왼쪽구역과 김철 선생의 사당과 기념관 및 동상이 서 있는 오른쪽 구역, 청사 뒤 김철 선생과 두 부인이 함께 묻힌 묘역이 그것이다.

2002년 건립된 동상 속 김철은 오른손을 펴들고 왼손에는 외투를 걸친 양복 차림의 멋쟁이였다. 동상 옆이 연수관이고 그 맞은편이 김철 기념관이다. 기념관은 아담하고 소박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그의 대형 사진과 함께 1920년 1월 10일 독립신문에 실린 그의 글 '신년의 감상'이 새겨 있다.

기념관은 출생과 성장, 임시정부와 김철, 한인 애국단과 김철, 서거와 추모 등이 판넬로 제작되어 있어, 김철의 생애를 잘 설명해준다. 기념관 전시물 중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이란 제목을 단 대한민국 원년(1919) 10월 11일자가 새겨진 사진인데, 안창호 선생 등과 찍은 사진이었다. 1919년 10월이면 초대 교통차장 시절인데, 국무위원 중 가장 키가 큰 쾌남아다.

의열문(義烈門)을 지나면 그의 영정을 모신 사당 구봉사(九峯祠)다. 김구 선생이 쓴 '독립정신(獨立精神)'이란 글자 뒤로 김철 선생 영정이 위패를 대신하고 있다. 다른 영정과 달리 화가가 그렸는데, 화가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왼쪽 임시정부청사가 재현된 건물 앞에는 오른손을 불끈 쥔, '안중근 장군'이라는 이름이 붙은 안중근 의사 동상이 서 있다. 전국 15개의 안중근 동상 중 '의사' 대신 '장군'이란 호칭이 붙은 유일한 동상이다. 동상 앞 표지석에는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153명이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의 직위를 '대한의군 참모대장 안중근 장군'으로 특진시켰다." 라는 서술이 있다.

1908년 안중근이 연해주 크라스키노(연추)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할 때의 공식 직함은 '동의회 우영장'이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은 안중근의사가 재판을 받으면서 밝힌 가공의 직책이고, 이때 참모중장의 중장은 현 대한민국 군인 계급인 별 셋인 중장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그런데 18대 국회의원들이 '중장'을 별 셋으로 이해하고 별 넷인 '대장'으로 승진시켰고, 동상 이름도 '대한의군 대장 안중근 장군'으로 부르고 있어 조금 당황스럽다.

안중근 의사 동상 뒤 건물은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를 그대로 재현한 임시정부청사 독립역사관이다. 재현된 청사에는 '1920년대 상해', '일제의 만행과 고문',' 함평이 품은 임시정부'라는 3개의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3층의 붉은 벽돌집 형태, 회의실과 빛바랜 태극기,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요원 집무실, 이봉창·윤봉길 등 애국지사들이 썼던 임시숙소, 책상 크기며 계단 폭까지 실제 청사와 정말 비슷하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과 창문 등도 그대로 복원했고 전구, 숟가락, 재떨이 등도 중국 고건축업체로부터 수집해서 재현해 놓았다.

임시정부청사 독립역사관 왼쪽으로 돌아가면 정말 멋진 노송(老松)이 서 있다. 그런데, 아뿔사! 그 노송은 김철 선생의 첫째 부인 김해김씨가 목을 매고 숨진 '순절 소나무' 또는 '단심송(丹心松)'이라 불리는 소나무였다. 1917년 중국 상해로 망명한 김철 선생은 "나는 조국 독립을 위해 기꺼이 이 한 몸 조국에 바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대하지도 말고, 부인께서는 앞날을 알아서 처신하시오."라는 편지를 보낸다. 당시 부인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부인 김씨는 "부군이신 선생께서 가족 걱정 없이 오로지 독립운동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서는 죽는 길밖에 없다"라고 결심한다. 그리고 이곳 소나무에 목을 맨다. 독립운동가의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아픈 역사가 단심송에 묻어 있는 것이다.

단심송 바로 곁이 두 부인(김해김씨, 수성최씨)과 함께 묻힌 김철 선생의 묘다. 물론 김철의 묘는 시신 대신 항저우 공동무덤에서 파온 흙 한 줌이 전부다. 두 부인과 함께 김철 선생의 '혼'과 '정신'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무덤을 두른 둘레돌에 '애국애족(愛國愛族)' 네 자가 새겨져 있다.

전라도 유일의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일강 김철 선생은 죽어서도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독립운동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