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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정별(栗亭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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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정별(栗亭別)

박간재 전남취재부장

게재 2022-07-06 15:53:00
박간재 전남취재부장
박간재 전남취재부장

나이가 들어가는가 보다. TV나 신문에 사별(死別) 장면이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때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요 며칠전에도 홀로 한참이나 눈물을 훔쳤다. 건강하시던 큰누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누님은 세 아들과 손자들을 '일류'로 키워놓으신 덕택에 남부러울 게 없었지만 그 누님을 생각할 때면 늘 허전한 마음이 앞선다. 당시 시대가 그랬다지만 아버지는 아들보다 딸교육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그 누님은 물론 그 아래 줄줄이 누님들도 역시 초등학교 문턱만 밟았을 뿐이다. 가족모임이 있을때면 "아버지가 누님들을 중학교라도 제대로 보냈다면 누님들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요." 그 말에 누님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얼마나 딸들을 이뻐했는데, 다들 야물딱지게 잘살고 있으니 그런 얘기는 하지말라"고 오히려 역정을 내셨다. 누님들의 아버지 사랑은 가히 없었다.

부모, 자식간 이별도 서러울 일이지만 형제간 이별 역시 가슴 아픈 일이다.

10여년 전 취재차 들렀던 나주 옛 주막 '율정점(栗亭店)' 역시 슬픈 이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형제간 이별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어서다. 현재 나주 동신대 인근으로 조선시대 때는 밤나무골로 불렸다. 목포 방면과 강진 방면에서 올라오는 길과 서울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 지점에 있는 큰 주막이다. 술밥을 먹고 하룻밤을 잔 뒤 서울과 목포, 강진 방면으로 떠나던 곳이다.

1801년 11월5일. 찬바람 일던 해질 무렵 지친 기색의 두 형제가 주막으로 들어섰다. 한양에서 천릿길을 걸어오던 차였다. 두 형제의 이름은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신유옥사(1801년)로 형은 완도 신지도에서, 동생은 경북 포항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 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서울로 불려 올라 갔다가 무죄로 풀려나던 날 곧바로 귀양길에 오른 것. 두 형제는 하룻밤을 울음으로 지샌 뒤 다음날 형은 신안 흑산도로, 동생은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났다. 이 날이 두 형제가 이승에서 본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밤 울며 이별의 슬픔을 읊었는 데 그 시가 바로 '율정별(栗亭別)'이다. 18년 뒤 귀양에서 풀려난 다산이 이 곳을 지나면서 또한번 형 생각을 하며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취재하면서 나주 율정점이야말로 강진 다산초당보다 더 유서깊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지자체에서 관심을 갖고 관광상품화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사를 더 썼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민선8기가 시작됐다. 코로나19로 갇혔던 전 국민들이 새로운 의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갈 태세다. '책상머리 행정' 말고 이런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을 발굴해 선보인다면 이보다 더한 관광지가 또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