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명(考終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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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고종명(考終命)
  • 입력 : 2022. 09.14(수) 16:48
  • 최도철 기자
"부처님 앞, 연등 아래 널찍한 마루에서 회색 승복을 입은 두 여자가 도란도란 거리면서 더덕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화해로운 분위기가 아지랑이처럼 두 여인 둘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몸집에 비해 큰 승복 때문인지 어머니의 조그만 몸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큰 나비처럼 보였다. 아니 아니 헐렁한 승복 때문만이 아니었다.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그 가벼움, 그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박완서 '환각의 나비' 본문에서)

마음을 울리는 소설을 쓴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작가 박완서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나목' 등 수작들을 많이 남겼다.

장·단편을 포함해 수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의 '최애작'은 무엇일까. 박 작가는 스테디셀러가 된 대표작을 모두 뒤로하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는 문제로 남매가 벌이는 갈등과 홀어머니의 내밀한 아픔을 묘사한 '환각의 나비'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꼽았다.

우리 문학작품 가운데 '환각의 나비' 외에도 이승우 '검은 나무', 박범신 '당신_꽃잎보다 붉던',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등 치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들이 더러 있다.

죽음보다 무섭다는 치매(癡呆)는 뇌가 손상돼 지능, 학습, 언어 등의 인지기능과 정신기능이 떨어지는 복합 증상이라고 한다. 요즘은 '영츠하이머(young+alzheimer)'라는 조어가 생길 만큼 젊은 층에서도 간혹 발생한다고는 하나, 노년기에 주로 생기는 치매는 심장병, 암, 뇌졸중에 이은 4대 주요 사인(死因)으로 분류된다.

치매는 다른 질환과 달리 환자의 인간 존엄성이 무너지고 온 가족이 함께 고통받는 무서운 질병이다. 장기간 환자를 돌봐야 하기에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는 물론이고 경제적 부담또한 만만치 않다.

사람들이 치매를 두려워하는 것은 '곱고 깨끗하게 죽고 싶은' 소망 때문이다. 치매에 걸리면 나 자신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마저 기억에서 사라진다. 수년간 이어지는 간병에 가족들도 지쳐 버린다.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는 싸움인데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런 죽음이 가장 싫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누구나 한번은 삶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지만,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고 그 순간을 맞을 수만 있다면 그 또한 더할 나위 없는 큰 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섯 가지 복중에 가장 큰 복은 천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고종명(考終命)이지 않을까. 구순을 훌쩍 넘긴 노모와 함께 사는 아들은 달력에 써진 '치매극복의 날(9월 21일)'을 보고 생각이 많아진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