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도전> 이종덕 금호화성(주) 대표이사 회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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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호남사람들
나의 삶, 나의 도전> 이종덕 금호화성(주) 대표이사 회장 (2)
잇단 실패에 좌절…가족 생각하며 재기 ||권력 앞에 '빽' 없는 설움 당하기도 ||스펀지 사업전망 타진 후 본격 도전
  • 입력 : 2020. 02.03(월) 13:50
  • 서울=강덕균 선임기자 dkkang@jnilbo.com
 고려대학교 대학원 총교우회 수석부회장, 원우회장 등으로 활동하던 시절 김상현 민주당 상임고문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있는 이종덕 회장.
 상경한 후 꼬박 1년 정도 일을 한 뒤 잠시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가게 주인은 1만1400원을 손에 쥐어 주었다. 애초에 숙식만 해결된다면 좋겠다는 급한 마음에 주인과 약속을 그리 했지만 1년간 일한 대가가 고작 1만원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주인을 원망하지 않고 더욱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중 가게 주인의 개인사정으로 가게가 망할 처지에 놓이자 청년 이종덕은 자신을 거둬 준 주인의 고마움에 보은 차원에서 "본인이 가게를 꼭 살려 보겠으니 자신에게 가게의 운영을 맡겨 달라"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3년 반 만에 첫 직장을 떠나야 했다.

 첫 직장에서의 아픔과 시련을 겪은 후 이종덕은 이를 앙다물고 업종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는데 열중했다. 돈이 모아지면 가게를 차렸고 실패하면 다시 돈을 벌어 점포를 열었다. 사업 경험이 없었고, 자본이 튼실하지 못했던 그에게 실패는 반복됐다.

 그러던 24세(1970년) 되던 해, 또 다시 사업자금이 모아지자 그는 서울 충정로3가에 육류를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중앙부처나 정보 분야 권력기관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때였다. 길 건너편에 같은 업종의 점포를 운영하던 가게주인의 사위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 그 가게는 사위를 동원, 이종덕의 가게에 대해 부정축산물 유통이라는 명목으로 집중단속을 실시하는 등 방해를 일삼았다.

 너무나 억울했던 이종덕은 가게의 집주인이었던 전상수 목사(당시 전모 공보실장(현 문화광관부장관)의 동생)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전 목사는 이종덕과 함께 당시 김재규 보안사령관을 찾아 가서 부당함을 알렸고, 김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에 알려 그 사위를 문책했다. 그러나 이종덕은 육류가게를 일으켜 세우는데는 역부족이었다. 힘없는 전라도 출신 젊은이는 부당한 권력앞에 힘없이 쓰러져야 했다. 참담했다. 연이은 실패와 막강한 맨파워의 현실을 경험한 이종덕은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성공에 대한 초심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열심히만 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어지면서 좌절이 찾아왔다. 그에게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유혹이 다가왔다. '성공하지 못할 바에는 죽자'는 마음이 들었고 26세 되던 여름, 수면제 50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지금은 수면제를 다량 복용해도 죽지 않게 제조가 돼 나오지만 당시만 해도 그 정도 수면제를 한꺼번에 복용하면 깨어나지 못할 때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다시 깨어난 것이다. 그때 이종덕은 생각했다. 제2의 인생을 살도록 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와 합당한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떠오른 생각은 '내가 죽게 되면 조부모와 부모님의 마음에 안길 상처와 함께 어려운 가정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많은 동생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였다고 했다. 장남으로서 책임감이 다시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마음을 추스린 그는 그해 완전히 새로운 사업에 뛰어 든다. 오늘 날의 그를 있게 한 스펀지(플렉시블 폼)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상경한 동생을 지인이 운영하던 스펀지 대리점에 취직시켜 주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정보를 알게 된 이종덕은 스폰지 대리점을 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업전망을 탐색하게 된다.

 '인생의 끝'을 경험한 이종덕은 무서울 게 없었다. 맨주먹밖에 없지만 오직 자신감 하나를 믿고 본격 사업에 뛰어들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운다. 1972년, 현재의 금호화성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만만스펀지'라는 상호를 걸고 서울 마장동에 소규모 대리점을 차린다.

서울=강덕균 선임기자 dkkang@jnilbo.com dukkyun.ka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