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41> 도시마다 떠도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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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41> 도시마다 떠도는 이야기들
※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 입력 : 2020. 12.10(목) 11:35
  • 편집에디터

41-1. 위스퀴다르에서 바라본 마이덴 타워.

1. 슬픈 처녀의 성

귀국 며칠 전이었다. 그동안 이스탄불에 머무르면서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고 생각했지만 일종의 마무리 같은 이벤트가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에어비앤비'를 통해서 현지인 가이드가 진행하는 나이트 워킹 투어를 신청했다. 투어 날짜는 이틀 뒤인 일요일이었는데 가이드는 금요일 밤 날씨가 너무 좋다면서 바로 '오늘' 투어를 하자고 했다. 그는 일요일에 눈이 올 거라고 덧붙였다. 나는 20리라를 주고 산 목도리를 두르고 애미뇌뉘 항구로 향했다.

메디컬 센터에서 근무하지만 가끔 여행객을 위해서 3~4시간 동안 시내 투어를 한다는 20대 중반 가이드 이름은 아흐메드였다. 그와 애미뇌뉘에서 페리를 타고 아시아 지구인 위스퀴다르로 향했다(원래는 5~10명 정원인데 코로나바이러스19 영향으로 1:1 투어가 되었다). 이곳 선착장 인근에서는 '처녀의 성(크즈 쿨레시, Kız Kulesi)'이라고 불리는 '마이덴 타워(Maiden's Tower)'를 볼 수 있다(실은 '마이덴 타워' 코스 투어라 신청을 했다).

마이덴 타워는 예로부터 연인의 탑으로 알려져 있는, 900년 전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바다 위 인공 섬이다. 지금은 작은 전용 선박을 이용해서 왕복할 수 있는, 꽤 유명한 '레안드로스(Leander)'라는 레스토랑이 있다. 비교적 비싼 그곳에서 식사하지 않을 바에는 위스퀴다르에 있는 해안가에서 야경을 즐기는 것도 좋다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조명에 아름답게 빛나는 모스크가 있는 해안가에서 마이덴 타워를 보았다. 보고 있을수록 점점 빨려드는 듯했다.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자 그가 입을 열었다.

옛날 옛날에 어렵게 딸을 얻은 왕이 있었어. 탄생 축하 자리에서 예언자가 말했지. 공주가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뱀에게 물려 죽을 거라고. 왕은 딸을 구하려고 고민했어. 마침 좋은 방법을 떠올렸지. 뱀이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 거였어. 왕은 흙이 없는 바다에 탑을 지었어. 그곳에서 공주는 아름답게 자랐지. 예언자가 죽는다고 말한 열여섯 살 생일을 드디어 맞이했어. 왕은 너무 기쁜 나머지 공주가 좋아하는 과일 상자를 생일 선물로 보냈어. 하지만 상자 안에는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이 있었지 뭐야. 결국 공주는 예언대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지.

이야기를 끝마친 아흐메드는 의외로 시니컬하게 코웃음을 치면서 덧붙였다. 그것은 웃기는 스토리란다. 1763년 바로크 양식 탑으로 재건되기 전까지 마이덴 타워는 12세기 비잔틴 제국 때 지어진 해양 초소였단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드나드는 배들을 감시하기 위해서란다.

사실이 어찌됐든 어둠이 몰고 온 찬바람 속에서도 고귀하게 빛나는 마이덴 타워는 꽃도 피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처녀의 슬픔처럼 애달프게 빛났다. 실제 사랑이야기를 바탕으로 전해지는 피에르 로티 언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2. 피에르 로티(Piyer Loti) 언덕

피에르 로티는 이스탄불 구시가지의 에웁(Eyup) 지구에 있는 해발 200m 정도 되는 언덕 이다. 이렇게 불리기까지 프랑스 해군 장교이자 소설가(본명은 줄리앙 비오, Julien Viaud)인 피에르 로티(Pierre Loti, 1850~1923)의 영향이 컸다.

1876년 터키 이스탄불 주재 프랑스 상무관에 스물여섯 살인 그가 부임한다. 열정적이면서도 낭만적이었던 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스탄불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그만 우아하고 아름다운 터키 여인 아지야데(Aziyade)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가 첫눈에 반한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골든 혼이 내려다보이는 공동묘지 언덕에서 몰래 사랑을 나누곤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상처를 받은 피에르 로티는 터키 근무를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간다. 그리고 1879년에 그녀와의 사랑 이야기를 출판한다(《아지야데 Aziyadé》).

소설은 프랑스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그는 성공한 시인이자 소설가가 된다. 7년이 흐른 뒤, 피에르 로티는 이스탄불로 다시 돌아와 아지야데를 찾지만 안타깝게 그녀는 그가 떠난 지 1년도 못 되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피에르 로티와의 사랑을 알게 된 가족은 그녀를 이슬람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명예살인을 한다.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게 된 피에르 로티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언덕에 자주 올라가 죽은 아지야데를 그리워하며 평생 터키인으로 살아간다. 그 후 이 언덕은 그의 이름을 따서 피에르 로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가 머물렀던 찻집도 140년이 넘도록 피에르 로티로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3. 도시마다 떠도는 슬픈 이야기

그 언덕을 이스탄불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갔다. 패키지 관광객 대부분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지만, 나는 다랑이 논처럼 조성된 공동묘지를 돌고 돌아 정상으로 향했다. 언덕에 다다랐을 때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뻗어 있는 골든 혼(Golden Horn)이 한 눈에 들어와서 환호성을 터트린 기억이 있다.

"그런데 말이야, 그 남자 너무 무책임하지 않니? 지적인 그는 이슬람 문화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 아니야? 명예살인 정도는 알았겠지. 그렇다면 그가 그 여자를 죽인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그녀는 결혼을 했어. 여자의 몸가짐을 먼저 문제 삼아야 해."

의외로 아흐메드는 터키인인 아지야데를 냉정하게 대했다.

"이크, 너는 너무 가부장적이야. 종교 때문이니?"

나는 나침반처럼 메카를 향하는 바늘이 있는 손목시계를 차고 있는 아흐메드와 열띤 토론을 벌이면서 겐겔쿄이(카드쿄이, Kadıköy)로 버스를 타고 가서 보스포루스 제1대교 야경의 아름다움을 즐기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위스퀴다르 선착장으로 돌아와서는 배를 타고 베식타시(Besiktas)로 갔다. 그곳에서 내가 머무는 아파트까지 걸어왔다. 7시 30분부터 11시까지 바쁘게 돌아다녔던 1:1 투어의 결론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가 특정 장소를 윤택하게 한다는, '스토리텔링의 힘'에는 의견이 같았다. 아파트 근처까지 나를 배웅해준 그는 2년 동안 가이드하면서 한국인 고객을 처음 만났다며 남은 일정을 잘 마무리하라고 했다. 정말 귀국할 시간이 며칠 남지 않았다.

※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41-2. 위스퀴다르 해안가.

41-3. 겐겔쿄이(카드쿄이, Kadıköy)에서 바라보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 야경.

41-4. 피에르 로티 언덕에서 바라본 풍광.

41-5. 피에르 로티 언덕 아래에 있는 상점들.

41-6. 피에르 로티 언덕에서 감자 칩을 파는 터키인.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