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46>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 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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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46>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 올레
설문대할망도 눈물 흘린 표선해수욕장 사건-제주올레길 제4코스||※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 입력 : 2021. 03.04(목) 11:23
  • 편집에디터

46-1. 올레길 제4코스에 있는 가마등대(최초점등 1984년 12월 24일)

1) 설문대할망 전설과 제4코스 시작 표선(表善)해수욕장

옛날 제주도에 설문대할망이라는 거인할머니가 살았다. 할머니는 한라산보다 더 커서 아무리 깊은 바다라 해도 무릎 정도 깊이밖에 안됐다.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한 발은 성산일출봉에, 다른 발은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쳐야 했다. 빨래도 관탈섬에 놓고 팔은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서서 발로 문질러 빨아야 했다.

제주의 360여 개의 오름은 설문대할망이 예기치 않게 만든 것들이다. 그녀가 제주도를 만들기 위해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를 때 터진 구멍으로 조금씩 새어 나온 흙이 쌓여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날라다 부은 것이 한라산이다. 올레길 제3코스 마지막이자 제4코스 시작점인 표선 해수욕장도 설문대할망의 작품이다.

표서면 해안은 원래 물이 깊어서 파도가 일면 바닷물이 마을까지 들어왔단다. 해마다 아이들이 그곳에 빠져 죽었다. 이를 보다 못한 마을 주민이 할머니에게 명주 속옷을 선물하면서 부탁하자, 설문대할망은 동쪽의 남초곶 숲 나무를 하룻밤 새에 모조리 베어다가 그 나무와 모래로 백사장을 만들어주었다. 물이 빠진 뒤에 백사장의 모래를 헤쳐 보면 굵은 나무들이 썩은 채로 깔려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한다.

길이 0.8km, 넓이 8만 평에 이르는 너른 백사장. 썰물 때에는 커다란 원형 백사장이지만 밀물 때는 바닷물이 둥그렇게 들어오면서 마치 호수처럼 보이는 그곳에 전날 도착했을 때는 눈바람이 불고 물이 빠져 나가 한줄기 눈물처럼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제4코스를 돌기 위해서 다음날 왔을 때는 전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물이 차 있었다.

2) 기억이 만드는 장소들

나는 표선해비치 해수욕장 건너편에 있는 올레 공식 안내소 앞에 설치된 스탬프 박스에서 제4코스 시작 스탬프를 찍고 화살표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도로를 따라 상가 건물이 죽 늘어서 있지만 궂은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코로나바이러스19 영향인지 아침 10시가 지난 시간이었지만 불 켜진 상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한산한 그곳을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와 포구로 향했다.

표선은 다른 곳보다 내게 지리감이 있다. 8일 동안 머물렀던 숙소가 표선면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올레길 걷기 전에 잠깐씩 머물렀던 곳도 여기였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들렀던 제주민속촌을 약 20년이 지나서 갔을 때도 그때의 포토존이 여전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무엇보다도 9km에 달하는 해안길이 걸을 만하다. 표선해비치를 지나 검은 돌밭과 풀밭이 펼쳐지는 당케('당집이 있는 케'라는 의미. '당'은 '할망당', '케'는 경작지) 포구를 시작으로 갯늪, 가는개, 토산 산책로로 이어지는 그곳에 올레꾼들이 몰리는 이유이다. 굳이 올레꾼이 아니더라도 그 근방에 머무르는 여행객들이 운동 삼아 걷기도 한다. 해안길을 따라 띄엄띄엄 카페와 음식점들 그리고 숙박시설이 마침 쉬고 싶을 만 한 거리에 들어서 있다.

내가 걷고 있는 2020년 12월 31일 상황은 그리 좋지가 않았다. 음식점들이 거의 문을 닫았다. 그래서인지 내심 점찍어 두었던 곳이 실내등이 켜있자 서슴없이 들어설 수가 있었다. '표선해녀의 집' 식당이다.

이곳은 5년 전 올레길을 걸었을 때도 들렀다. 춥고 배고팠던 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곳은 나를 반겨주었다. 향수에 젖게 했던 온기 가득한 화목 난로와 푸짐한 전복죽도 예전 그대로였다. 주인은 바뀐 듯했다. 오래전에는 외지에서 온 젊은 남자 둘인 듯 했는데 지금은 인심 좋게 웃고 있는 나이 든 여자 분이다. 전복죽을 주문하고는 난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길가에 녹지 않고 쌓여있는 눈 때문에 흠뻑 젖은 조깅화와 양말을 벗어서 금방 불을 지폈는지 온기가 덜한 화목 난로 옆에 두었다. 그때였다. 출입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전날 내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걷던 야광 방수 바지의 남자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본 것이.

3) 눈 속의 붉은 그네

"저도 예전에 띄엄띄엄 올레길을 걷긴 했죠. 그런데 아는 사람과 몰려다니면서 걷다보면 중간에 멈춰서 술판을 벌이더라고요. 이참에 올레길 패스포트를 구입해서 제대로 걷자고 다짐했어요."

"스탬프의 마력? 기어코 완주해서 처음, 중간, 끝을 다 찍고 싶은 초딩 같은 마음이시군요."

"그렇다고 봐야죠. 숙제 잘 하거나 받아쓰기 잘 볼 때 '잘 했어요'라는 스탬프를 선생님에게 받는 그 느낌. 하하. 그래야 체계가 있죠."

내 옆에 자리를 잡은 그와 인사치레가 끝나자 그가 먼저 올레길을 걷게 된 이유를 말했고 나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우리는 연이어서 제2공항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5년 전 이곳에 왔을 때 주인인 듯한 젊은 남자 둘이 제2공항에 대해 우려한 것이 떠올라서였다. 그때도 지금도 핫한 토론 거리였다. 막 남자가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려고 할 때 식당 주인이 푸짐한 전복죽을 쟁반에 내왔다. 남자는 자신도 전복죽을 먹어야겠다면서 주문했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우리는 눈보라를 몰고 오는 사람들인가 봅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서 나도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로 하얀 눈송이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유독 내 눈길을 끈 것은 도로 건너편에 여행자들을 위해 마련해놓은 붉은 그네였다. 흰색과 붉은 색의 조화라고 할까. 불현 듯 전날 본 한 줄기 눈물처럼 백사장을 가로지르던 표선해비치 모래사장과 오버랩되었다. 그곳은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4·3 항쟁 때였다. 가시리(加時里)와 토산리(兎山里) 등 중산간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 마을을 비우라는 토벌군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야 있을까, 라는 마음으로 무심하게 밭일을 이어갔다. 토벌대가 이들을 잡아끌고 가서는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던 곳이 표선백사장이었던 것이다. 8만평의 하얀 백사장이 붉은 피로 물들었을 것은 뻔하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초까지의 일이었다.

남자가 다시 주의를 환기시키며 제2공항에 관한 의견을 말했지만 나는 너무 할 말이 많아 침만 삼키고는 전복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등 뒤에서는 여전히 시린 눈송이가 휘날리고 있었다.

※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46-2. '표선해녀의 집' 식당

46-3. '표선해녀의 집' 식당 맞은 편 그네

46-4. 태흥리 포구 해녀 벽화

46-5. 눈 그친 바닷가 풍경

46-6. 당케포구에 있는 올레 화살표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