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이슈 32-4> 광주시민 여러분 전남대생 박승희를 기억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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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이슈 32-4> 광주시민 여러분 전남대생 박승희를 기억하시나요?
오창규 박승희열사 30주기 행사위원장
  • 입력 : 2021. 05.02(일) 18:14
  • 편집에디터
오창규 박승희열사 30주기 행사위원장
30년 전 1991년 4월29일, 스무살의 전남대생 박승희는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이제는 열사라 불리우는 박승희 열사는 1991년 4월26일, 서울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교내 시위 도중 폭력경찰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고 사망한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설상가상 그 무렵 같은 대학 전남대 최강일 학생이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한 쪽 눈을 실명당하는 사건이 겹쳤다. 이른바 광주 학살 원흉의 하나였던 노태우 군사정권은 국민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공안통치를 자행하고 있었고, 비무장 시위대의 피해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박승희 열사가 분신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은 시대의 불감증에 무감각한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사랑도 분노도 느끼지 못하는 군상들에 대해 한탄하며 '이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어서는 안된다'고 주변인들에게 말하곤 했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가 오히려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탄압하는데 '불감증'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는 우리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승희는 절망하였고 스스로를 붙태워 시대의 어둠을 밝히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겨레의 딸 자주의 불꽃'이라 부른다.

박승희를 떠나 보내던 그 날, 1991년 5월 25일 도청 노제를 잊지 못한다.

전남대학교에서 장례식을 마친 대열이 도로를 가득 메웠다. 그 선두가 금남로 구 전남도청 앞에 이르렀을 때도 대열 후미는 아직도 전남대를 빠져나가고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벗이자 동지인 박승희열사를 망월동 5·18구묘지에 안장하고 해마다 망월묘지를 찾아 추모제를 지내왔다.

박승희 열사를 비롯해 50여명의 민족민주 열사들과 수백여 5·18영령들이 묻혀있는 망월동 5·18묘지는 한국 변혁운동의 심장이다.

그 곳에서 끊임없이 분출하는 민주화운동의 에너지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밑거름이 됐고 1991년 5월 열사투쟁의 자양분이 됐으며 21세기 촛불항쟁으로 타올랐다. 이 땅 모든 열사들의 시선 끝은 오직 한 점에 모이나니 바로 국민대중이 주인되는 자주적인 평화통일국가다. 그것은 박승희 열사가 바라보았던 북극성이고 장차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박승희를 기억함에 있어서 그녀의 마지막 외침을 잊을 수 없다.

"노태우를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 2만 학우 단결하라!" 바로 박승희열사가 만 19세의 나이에 자신의 단 하나뿐인 목숨과 바꾼 구호이다.

1980년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5공화국의 전두환 그리고 6공화국의 노태우, 이들 신군부 세력의 군사독재에 맞서 국민들이 민주화를 외칠 때 돌아오는 것은 공권력을 동원한 국민과의 전쟁선포였다. 얼마나 시위진압을 공격적이고 전투적으로 했으면 시위 학생이 폭력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고 직격최루탄에 눈알이 튀어나가고 토끼몰이식 해산작전에 여대생이 압사당해 사망했겠는가?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 김남주 시인의 통찰력은 정확했던 것이다.

또 1980년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 세력이 5·18광주민중항쟁을 총칼로 장갑차로 무차별 살육할 때 혈맹 우방이라며 세계경찰을 자임했던 미국은 무얼 하고 있었던가?

신군부의 광주학살을 묵인하고 방조하고 심지어 20사단 추가 파병을 승인하지 않았던가?

박승희 열사의 마지막 외침 속에는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독재권력의 배후에 비켜있는 아메리카 제국주의를 향한 서슬퍼런 분노가 서려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박승희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정신을 함께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박승희를 기억해왔지만 앞으로 또 30년 아니 그 이후로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30년 전 박승희는 만19세의 나이에 육체적 생명을 마감하고 말았지만 그녀의 사회적 생명은 자신의 벗들과 후대들 속에서 영생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박승희를 기억하는 의미이고 방식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