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우리나라에 어떻게 성경이 들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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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우리나라에 어떻게 성경이 들어왔을까
■이양선의 출몰과 성경 최초 전래||성경 자체 전래는 1816년 마량진|| ‘영어 성경’으로 큰 의미 없어 || 1832년 귀츨라프의 성경 전래 ||선교 목적 ‘한문 성경’으로 의미
  • 입력 : 2021. 10.07(목) 17:17
  • 편집에디터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서천군청 제공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죽선(三帆竹船)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1832년, 「순조실록」 32권 7월 21일 기사 내용이다. 지난 칼럼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전래자로 알려진 귀츨라프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이것을 이양선의 출몰과 관련하여 풀어본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경을 전래한 사람이 귀츨라프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른바 대항해시대로 불리는 격동의 시기,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 유럽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동양을 침탈하던 때이다. 무역을 빌미 삼고 통상을 요구하며 때로는 전쟁을 일으켰고, 기독교 전파와 식민지 확장이라는 양날의 칼을 들고 동양세계 전반을 압박해왔다. 귀츨라프 일행도 선교여행 혹은 무역을 목적으로 한 무리였다. 그가 타고 있던 배의 이름은 'Lord Amherst'로 흔히 로드 애머스트호라고 불린다.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는 독일(프러시아) 출신으로 네덜란드 선교회 파송 선교사다. 첫 번째 여행은 1831년 6월 3일부터 12월 13일까지 6개월여 기간이다. 목적지는 중국의 천진(텐진)이었고 출발지인 마카오로 귀환한다. 이때 만주 타타르지역을 방문한다. 타타르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달단족이라 한다. 민족이 분화한 후 우리나라에 대거 유입되어 유랑민으로 활동하다가 정착한 바 있다. 참고로 나는 이들이 각설이패의 원조격 유랑자들이었다고 정리해둔 바 있다. 위 실록은 귀츨라프 일행이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에 속하는 고대도 뒤편 바다에 정박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832년이니 개신교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1884년에서 1885년보다 50여 년이 빠른 시기다. 하지만 단순한 성경의 전래는 이보다 더 빠르다. 서천군 마량진 성경 전래지 기념비에 의하면 이보다 16년 앞서 마량진을 방문한 맥스웰 대령 일행이 조대복 첨사에게 성경 한 권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귀츨라프 연구자 허호익은, 성경 자체의 전래는 1816년 마량진이지만 그것은 '영어 성경'이었기 때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고, 1832년 귀츨라프에 의한 성경의 전래가 '한문 성경'이었으며 선교 목적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1816년 당시 영어를 해독하거나 이해하는 조선인이 없어 성경 전달의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마량포구. 서천군청 제공

이양선의 표류 혹은 출몰의 역사

1627년(인조 5년) 네덜란드인 3명이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박연(朴燕 또는 朴淵)이다. 김영원 외 '항해와 표류의 역사'를 인용해둔다. 본명은 벨테브레(Jan Janes Weltevree, 1595~)이다. 네덜란드 북부의 드 라이프(De Lijp)시 출생이다. 처음에는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 소속의 범선 홀란디아(Hollandia)호로 출항하였다. 이후 어떤 연유에서인지 우베르케르크(Ouwerkerck)호로 갈아타고 일본으로 가다 태풍으로 1627년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것이다. 본국에 있을 때 부인과 딸이 있었으나 조선에 귀화한 후 다시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또 1653년(효종 4년 8월)에는 네덜란드 상선 데 스페르베르(De Sperwer)호의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일행이 제주도로 표류했다. 하지만 이들이 성경을 소지하거나 우리나라에 전달했다는 정보가 알려진 적은 없다. 이후 1816년 맥스웰 중령에 의한 영어성경 전달로 이어진다. 오현기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 최초의 성경전달 사건인 영국 국적 군함 프리키트함 알세스트호(Alxeste)와 범선 리라호(Lyra)가 발해만 천진 북쪽 연하구(連河口)에 도착한 것이 1816년 7월이다. 알세스트호와 리라호가 1816년 8월 29일 발해만을 떠나 1816년 9월 1일 오전 9시 백령도와 대청도 사이에 도착하여(당시 기록한 좌표 37°50′N. 124°46′E.), 9월 10일까지 서해안을 측량하였으며 여러 섬을 발견하고 주민들과 접촉하고 마을들을 탐방하였다. 이때 영어 성경이 전달되지는 않았을까? 이에 대해 연구한 자료는 내가 아직 찾지 못하였다. 비인만은 리라호를 이끌던 바질 할 대령과 함께 온 알세스트호 선장 머레이 맥스웰의 제안으로 리라호 선장 바질 할의 아버지였던 저명한 영국 에딘버러 지질학회장 제임스 할(Sir James Hall)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되었다. 지금의 대청군도다. 오현기의 연구에 의하면 이 배들은 원래 영국의 맥스웰(Murray Maxwell, 1775~1831) 대령과 홀(Basil Hall, 1788~1844) 대령이 중국과의 외교교섭을 위해 영국 외교관 애머스트(Sir Jeffrey William Pitt Amherst)를 비롯한 외교 통상 특사단을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출항한 것이다. 이들은 중국의 광동지역에만 국한되는 기존의 무역 허용 지역을 넘어 새로운 무역을 위한 항구를 열어줄 것과 독점적 지위, 즉 유럽인들과의 독점무역과 조세 징수권을 누리고 있던 공행(公行)이라는 상인조합을 통하지 않고 자체적 무역을 행할 수 있도록 청원하기 위함이었다.

2016년 한국최초성경전래지 개관식. 서천군청 제공

남도인문학팁

애머스트호의 체류와 한문 성경 전래의 의미

애머스트호의 실험적 탐사는 1832년 동인도회사에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통상지를 개척 탐사하려는 목적으로 비밀리에 시행되었다. 타이완을 거쳐 조선, 일본에 이르는 항해를 통해 운항되었다. 상선이었던 애머스트호가 선교의 기능을 담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여성해방 등의 언술로 치장할만한 성향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의 아편전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이다. 류대영의 주장을 옮겨둔다. 귀츨라프라는 인물의 삶은 한국에 온 "최초의 선교사"라고 평가하고 말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한편에서 보면 그는 인도네시아(자바, 빈탄), 싱가포르,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중국, 한국, 류큐(오키나와), 일본을 포함하여 동아시아 거의 전체를 대상으로 선교했거나 선교를 위해 준비했던 열정적인 개척 선교사였다. 번역, 저술가, 출판가로서의 놀라운 활동도 그의 선교 활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그는 아편 밀수상을 위한 바다 길잡이 및 통역이었고 영국의 중국 식민지 행정관이었으며, 중국인 첩자들을 고용하여 영국의 아편전쟁을 도운 정보책임자이기도 했다. 한국교회와 연구자들은 이과 같은 귀츨라프의 양면성 가운데 개척 선교사라는 면에 치우쳐 주목하면서, 다른 쪽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최초로 한문 성경을 가지고 와 선교 활동을 했다고 해서, 단순히 미화하거나 긍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마찬가지로 원산도 혹은 고대도의 귀츨라프를 다룰 때, 귀츨라프가 갖고 있던 동양 특히 공자 사상에 대한 반론이나 여성관을 포함하여 선교를 빙자한 아편전쟁 첩자로서의 위치(3차 여행이므로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련은 적음)를 거론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간 논란이 되었던 충남의 원산도와 고대도 간 정박지 논쟁은 차수를 바꾸어 정리하겠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