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64> 끝나지 않은 길 위에 또 다른 이야기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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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64> 끝나지 않은 길 위에 또 다른 이야기의 미학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올레 18코스(19.8km) 제주원도심에서 조처 올레까지-⓵
  • 입력 : 2021. 11.18(목) 15:40
  • 편집에디터

산지천. 차노휘

18번 코스는 제주 시내 한복판에 있는 간세라운지에서 시작하여 사라봉정상(망양정), 곤을동 4·3유적지, 화북포구, 삼양검은모래해변, 불탑사, 신촌포구, 연북정을 거쳐 조천만세동산에서 끝난다. 나는 이 코스를 세 번에 걸쳐 천천히 걷기로 한다. 빠른 내 발걸음이지만 이야깃거리가 많은 이 길이 나를 붙들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른 아침 편의점 덱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실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커피를 다 마신 인부차림의 남자가 지나가면서 말을 남겼다.

"예전에는 이곳이 엄청 부자 동네였어요. 요즈음은 다들 바닷가로 나가니 구도시가 되었죠. 명맥만 '제주시 중앙로'라는 명칭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옛날에 장남에게는 중산간 밭을 주고 차남에게는 해변가 검멀레를 주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뒤바뀌었죠, 뭐."

남자의 말 때문일까. 급할 것 없는 걷기인데 마음은 어서 걷고 싶어서 17코스 종점이자 18코스 시작점인 간세 라운지(간세 라운지는 제주시내와 서귀포시내 두 군데에 있다)에서 올레길 패스포드에 흔적을 남기고는 밤새 내린 비로 촉촉한 포도를 바삐 움직여 지나쳤다.

건입동. 제주항이 보인다. 차노휘

아침 일찍 문을 연, 생선비린내가 훅 끼치는 동문 시장을 통과하자 말끔한 동문로터리가 나온다. 동문로터리는 사라봉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고 바다로 합류하는 산지천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 광제교와 산지교 아래로 흐르는 산지천은 그 바닥이 검은 현무암이다. 물빛도 검은 빛이지만 한없이 맑다. 산지노인자원봉사자들이 산책로를 가꾼다는 그곳은 화사한 꽃밭과 청명한 아침 하늘이 잘 어울린다. '집 마당에서 마을길로 나서는 어귓길(올레의 제주 토박이말)'에 들어선 나는 검은 현무암 바닥 산지천을 훑으면서 '쉬멍 걸으멍 생각하멍' 했다. 그래서인지 사라봉으로 향하는 길, 끝없이 몸통을 바꾸며 진화하는 이야기가 내게 왔다.

별도봉과 사라봉을 잇는 장수 산책로. 차노휘

이야기 하나- 별도봉 오씨선묘

"봉순아, 저 손님방에 이 술상 좀 들고 가거라." 오씨는 하얀 살결에 뺨이 붉은 계집종에게 술상을 맡겼다. 그 전에 계집종에게 단단히 일러둔 것이 있었다.

육지부에서 지관이 내려온 것은 4일 전이었다. 산을 들러보던 그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선친의 묏자리를 지정했다. 별도봉의 중턱 즈음이었다. 하지만 오씨는 선친의 묘에서 한참 동안 앉아 있는 지관의 표정이 썩 개운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나 접대가 소홀했는가도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삼시 세끼 바다에서 잡은 귀한 것과 육지의 귀한 것을 상에 올렸고 침구 또한 매일 햇볕에 고슬고슬하게 말려 준비시켰다. 선친 묏자리를 잡았으니 돌아가는 길에 노자돈을 충분히 챙겨줄 거라는 것 또한 넌지시 암시했다. 그렇다면 묏자리에 대한 탐탁지 않은 뭔가가 있는 것이다. 직접 오씨가 물어보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얼굴이 반반한 계집종 봉순이에게 술상을 봐가게 해서 슬쩍 떠보라고 언질을 주었다. 다음날 지관이 아침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리던 오씨는 그가 여장을 꾸리고 나서자 버선발로 따라나섰다. "선생님, 선친 묏자리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지관은 오씨의 질문에 아차, 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만 전날 술을 마시고는 경솔하게 계집종에게 사실을 말해버렸던 것이다. 술을 연거푸 따라주던 계집종은 지나가는 말로, '죽은 사람이 명당자리에 묻힌 게 맞지요?'라고 물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좋겠지만, 이 집 복에는 그 정도면 됐다.'라고 대답했다. 지금 오씨가 이렇게 묻는 것은 계집종에게 전날 했던 말을 전해 들어서일 것이다. "선친의 묏자리를 조금 위쪽으로 다시 보아 주십시오, 선생님."

애기업은돌. 차노휘

버선발로 쫓아 나온 오씨는 무릎까지 꿇으며 부탁하였다. 지관은 화들짝 놀랐다. 만약 어젯밤 계집종에게 말한 자리에 오씨 선친 묘를 잡으면 자신이 큰 화를 당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씨 집안사람들은 하늘로부터 명당을 받을 만큼 큰 덕을 쌓지 않았다. 명당자리는 하늘이 내려주는데, 그곳을 알려주면 그 비밀을 누설한 혐의를 자신이 받게 된다. 그러나 계집종에게 말한 이야기도 있고, 이렇게 체면도 사양하고 무릎까지 꿇으며 부탁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지관은 결국 자신이 육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장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묏자리를 알려 주고 말았다.

오씨는 지관이 떠난 일주일 뒤에 선친 묘를 이장했다. 별도봉 전체가 하나의 칼 모양이었다. 선친이 묻힌 자리가 칼집에 해당하는 곳이라면 이장할 묏자리는 칼집에서 칼을 조금 빼어 낸 형상이었다. 그 후 오씨 집안은 더욱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지관이 육지에 도착하고 얼마 후 갑자기 나타난 벌떼의 공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제주도에서 전통적으로 '산'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는 곳이 다섯 군데가 있는데 이를 '오대산'이라고 부른다. 한라산, 산방산, 영주산, 청산(성산일출봉), 두럭산이다. 화산활동으로 '솟아오른 것'을 오름('기생화산'이나 '독립화산체'라고도 한다)이라고 하며 총 368개가 있다.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계속해서 '플러스알파'가 된다고 한다. 그 중 옛날 봉수(烽燧)가 있던 오름 대부분에 '봉(峰)' 자를 붙인다. 별도봉과 사라봉도 마찬가지이다. 정상에 오르면 봉수대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사라봉(해발 148m)은 제주 시가지 중심에서 동쪽으로 2km쯤 떨어진 해안에 자리 잡은 오름이다. 주택과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오르막길을 걸어야 오를 수 있다. 접근하기 쉬운 곳이라 주민들의 운동장소로도 활용된다. 잘 관리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팔각정이 나오고 그 주위로 운동기구 등 편의시설이 있다.

사라봉 올라가는 마을길. 차노휘

팔각정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검푸른 바다 위에 뿌옇게 안개 낀 수평선, 특히나 매립지에 세운 탑동의 웅장한 건물과 제주항 여객터미널의 분주함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팔각정에서 크게 쉼 호흡을 한 뒤, 올라온 곳과 반대편으로 내려가 별도봉과 사라봉을 잇는 장수 산책로로 걸어간다. 화북봉 또는 베리 오름이라고 부르는 별도봉도 오름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반복되는 단단한 흙길인 산책로 해안가를 걸으면서 천기를 누설한 지관이 벌떼들에 둘러싸여 죽었다는 그 모양새와 비슷한, '애기업은돌'과 마주한다. 끝나지 않은 길 위에 또 다른 이야기가 몸통을 불리고 있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