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아시아 전통 구전음악의 연대와 공명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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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아시아 전통 구전음악의 연대와 공명을 위하여"
남도판소리, 아시아 소릿길 여행||광주 전통문화관서 펼쳐진||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3국의 구전 전승 유산 교류||노래와 춤 등 공연 외에||가수와 관련 전문가들이||실시간 영상 미팅으로 담소||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전개
  • 입력 : 2021. 11.25(목) 13:52
  • 편집에디터

대지의 노래 연주자들

"쑥대머리 귀신 형용 적막 옥방의 찬 자리에 생각 난 것은 임뿐이라~ 보고 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정별 후로 일장서를 내가 못 봤으니 부모 공양 글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는가~" 유장한 선율이 광주전통문화관 서석당을 잔잔하게 울렸다.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있는 '쑥대머리' 대목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선율이 마치 시조와도 비슷하고 우리 전통의 가곡, 가사와도 비슷하다. 반주악기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악기편성 가믈란이다. 우리의 징과 비슷한 악기(공이라 한다)를 작은 것에서 큰 것 순으로 놓고 치는 주물 악기는 물론 우리의 고대 북을 닮은 듯한 너비가 기다란 북, 우리의 편경이나 편종을 연상하게 하는 크고 작은 악기들의 편성이 이채롭다. 우리로 치면 '궁중음악'이나 '삼현육각 잡힌다'라고 하는 악기편성을 닮았다. 쑥대머리 편곡을 한 이에게 물었다. "노래는 한국의 판소리인데, 선율이 거의 가믈란을 닮았다. 어찌 편곡했나?" 대답이 돌아온다. "쑥대머리 노래의 중요 음을 마디마디 한두 음씩 배치하고 나머지는 인도네시아 방식의 선율로 메꿨다." 그래서 쑥대머리 노래인데도 전혀 다른 뉘앙스, 마치 완제시조(전라도의 時調를 부르는 말)를 듣는 듯한 느낌이 묻어났던 것이구나. 코로나 팬데믹이라 영상으로 교류하긴 했지만, 서석당을 꽉 채우는 듯, 서까래며 원기둥들에 스며들 듯, 잔잔한 선율에 압도당한 하루였다.

마라위주립대 시낭캄바요카 앙상블

인도네시아 서부수마트라 '살루앙(Sauang jo Dendang)'과 '덴당', '란다이(Randai)로부터

지난 11월 24일 광주 전통문화관(광주문화재단, 대표 황풍년)에서 펼친 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삼국의 구전 전승 유산 교류의 한 장면이다. 주제는 '남도판소리, 아시아 소릿길 여행'이었다. 노래와 춤 등 공연만 교류한 것이 아니라, 가수(창자)와 관련 전문가들이 실시간 영상 미팅으로 담소하는 '토크 콘서트' 형식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서부는 미낭까바우족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부계 사회가 아닌 모계사회이기 때문에 인류사에 몇 남지 않은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미낭까바우족의 예술은 말레이 예술 영향이 크지만 수마트라 전 지역에서 가장 다양한 예술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이 지역 여러 전통예술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통음악 장르가 '살루앙'과 '덴당'이다. '살루앙'은 우리의 퉁소나 대금 비슷한 악기다. '덴당'은 미낭까바우족의 보컬 예술의 하나로 판소리처럼 문학과 노래가 결합된 형태를 지닌다.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라면 판소리의 아니리는 없고 단순한 선율에 문학적 가사를 입힌 예술이다. '살루앙'이라는 관악기의 반주로 노래된다. 같은 멜로디를 계속하여 즉흥적으로 반복하는 형태다. '살루앙 조 덴당'이라고 하는데, 여기서의 '조'는 'and'의 뜻이다. 서부 수마트라 시골 지역에서는 '살루앙 조 덴당'이 라이브로 연주된다. 저녁 9시경부터 새벽까지 남자들이 모여 커피, 담배를 나누며 즐기는 전통인데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란다이(Randai)'는 우리나라 강강술래와 같은 원형진을 만들고 노래, 연주, 춤, 연극, 전통무술 '실랏'이 함께 공연되는 장르다. 가장 두드러진 풍경은 '실랏(남성들이 입는 치마)'을 손으로 쳐서 소리내며 연주하는 것이다. 우리의 '택견'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연극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5시간 넘게 연주된다고 하지만, 지금은 공연화되어 15분 내외로 연행된다. 미낭까바우의 옛 서사시부터 현대사회의 풍자까지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필리핀 다랑겐(Darangen) 서사시와 대지의 찬가, 티볼리(Tboli)의 노래까지

다랑겐 서사시는 우리의 판소리처럼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필리핀 민다나오 지방의 라나오 호수 근방에 살아가는 마라나오(Maranao)족의 방대한 지식을 담고 있는 옛 서사시이다. '노래로 이야기하다'라는 뜻을 지닌 다랑겐은 14세기에 필리핀에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장르다. 민다나오 섬에 퍼져있던 초기 산스크리트 전통과 관련한 광범위한 서사문학의 일부이다. 예컨대 결혼 축하연의 경우, 보통 여러 날 밤에 걸쳐 연행되며 전문적인 소리꾼이 다랑겐을 노래한다. 연행자에게는 엄청난 기억력, 즉흥적인 능력, 시적 상상력, 관습법과 혈통에 대한 지식, 흠없고 고상한 발성법, 장시간의 연행 동안 관중을 매료시킬 수 있는 능력 등이 요구된다. 다랑겐 노래는 음악과 춤을 수반하기도 한다. 대지의 찬가는 'Malem Dad Tana'라 불리기도 한다. 발란(Balan)족은 남쪽 코다바토 원주민들로, 이들에게 대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타나(Tana)곡은 우울, 슬픔, 기쁨, 황홀 등을 표현한다. 아기를 재우는 자장가, 작은 대나무로 만든 악기, 마치 한국의 다듬이질 리듬처럼 두드려대는 리듬과 선율 등이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양식을 '카스티푼'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산타령'이나 중저음 느린 선율의 민요들을 연상하게 해준다. 티볼리족은 필리핀 소수민족 내에서도 적은 수의 종족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쿨린탕(Kulintang)음악의 전통을 계승해오고 있다. 퉁공이라는 북, 고지대에서 모내기하며 추는 새춤, 결혼 구애 춤, 헬로붕이라는 피날레 음악 등 인류가 보존해야 할 구전유산의 특징들을 모두 갖춘 듯하다.

인도네시아 살루앙과 덴당 공연장면

남도인문학팁

아시아의 물골 따라 판소리와 남도창의 네트워크를 모색한다

한국에서는 김선이(광주시무형문화재)의 판소리와 고수 박시양(국가무형문화재)의 반주로, 고고천변(자라가 용궁에서 나오는 대목)을 들었다. 방성춘(광주시무형문화재)과 이순자(광주시무형문화재)의 소리로 남도민요 육자배기도 들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남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선율은 흥그레 타령이다. 이것이 장단과 선율의 옷을 입고 육자배기 노래가 되었기에 남도를 '육자배기토리 문화권'이라 한다. 이 바탕에서 가장 두드러진 구전 성악이 판소리다. 이 의미를 인정하여 우리나라 두 번째로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지정(2008년)되었던 것이다. 2005년까지는 유네스코에서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이라는 용어를 썼다. 구전(口傳) 곧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쓰여지지 아니한 역사, 예컨대 다랑겐의 서사시나 한국의 판소리 등이 인류사에 남을 유산이라는 뜻이었다. 이를 환기하며 '남도판소리, 광주에서 아시아의 소릿길을 열다'라는 주제로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이다. 유네스코뿐 아니라 아시아에 구전전승된 전통적인 성악들을 비교해보고 광주판소리의 아시아적인 네트워크를 모색해본 셈이다. 광주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라는 슬로건을 표방한 이래 실질적인 구전유산을 교류한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남도판소리의 연원 혹은 배경을 아시아의 물골(내가 제안한 물골론은 지난 칼럼 참고)을 따라 모색해보고 대표적인 구전 유산의 네트워크를 우선 아시아를 중심으로 여는 기회이기도 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오키나와, 대만 등 물길 따라 우리와 연결되어있는 여러 문화권에 서로 비교해볼 만한 인자들 그중에서도 유사한 인자들이 매우 많다. '아시아 구전 전통의 문화적 토대와 기원 여행'이라는 부제를 건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전통 구전음악에 주목하였지만 향후 지속적으로 이 연대와 공명을 넓혀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광주전통문화관 관계자들과 더불어 필리핀은 김정환 축제포럼 회장, 산디에고 교수 및 현지 연행자들, 인도네시아는 정지태 박사, 스리안토 교수, 현지 연행자 등 많은 이들이 수고해주셨다. 감사드린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