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남지 않은 사과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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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얼마 남지 않은 사과의 시간
김은지 전남취재부 기자
  • 입력 : 2022. 03.07(월) 17:17
  • 김은지 기자
김은지 전남취재부 기자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름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평생 동안 가슴에 묻어야 했던 이름이 있다.

'아버지'. '마광(삼베에 미친 사람)'이라 불리는 이찬식씨의 소원은 아버지를 목놓아 한 번 불러보는 것이다.

74년 전 여순사건 당시 그의 아버지는 '빨갱이' 꼬리표를 붙인 채 세상을 떴다. 억울한 죽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살아남은 이들에게 '아버지'는 금기어가 됐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은 그에게 '빨갱이의 자식'이라며 연좌제의 굴레를 씌웠고, 공직 진출도 막혀 결국 삼베 농사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달 9일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실무위원회'가 출범했다. 이들이 출범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실무위원회에 접수된 유족의 목소리는 140여건을 넘어섰다.

하지만 그들이 기다렸던 74년이라는 세월에 비하면 너무나 늦은 대책이었다.

여순사건과 뗄 수 없는 '쌍둥이 사건'인 제주 4·3사건은 20년 앞선 지난 2002년 특별법이 시행돼 진상 규명 조사에 돌입,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세 명의 대통령이 공식 사과했다. 2014년에는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하지만 여순사건은 7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초적인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못했고, 희생자 명예 회복 및 상처 치유를 위한 구체적인 법적 근거조차 마련되지 않은 채 유족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진상 규명을 위해 실무위원회에서는 1년간 진상 규명 신고를 접수한다. 이후 진상 규명 조사 개시를 결정하면 2년간 진상 규명 조사가 진행되며, 이후 진상조사 보고서를 작성해 공개한다. 유족들에겐 그 2년의 시간이 여태껏 기다려온 74년보다도 길게만 느껴진다.

취재 중 만났던 유족들은 대부분 70~80대 노인들이었다. 이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매체를 통해 접했던 또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이었다. 청와대, 국가 행사에 초청돼 정부의 사과를 받고, 대통령이 눈물을 닦아주었던 이들.

한 유족이 했던 말이 20대 대선을 앞두고 자꾸만 맴돈다. "이제 언제 갈지도 모르는데 보상보다도 눈 감기 전 사과라도 받고 싶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들어야 아버지 만나서도 면이 서지 않겠나".

김은지 기자 eunzy@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