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장수 가위에 숨겨진 훈훈한 전통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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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장수 가위에 숨겨진 훈훈한 전통 미학
  • 입력 : 2022. 03.17(목) 13:54
  • 이용환 기자

우리 문화 박물지. 디자인하우스 제공

우리 문화 박물지

이어령 | 디자인하우스 | 1만6000원

지난 달 26일 타계한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저서 '우리 문화 박물지'가 새로운 표지로 돌아왔다.

최근 K팝, K푸드, K콘텐츠 등 한류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한국 문화의 원형이자 정체성인 전통문화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어령은 일찍이 우리가 태어난 산하의 의미,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모른 채 살아가는 현 세태를 안타까워하면서 '제 것을 모른 채 살아간다면 새로운 삶과 지식이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책은 갓, 거문고, 보자기 등 한국 고유의 생활용품부터 바지, 바구니, 종과 같은 동서양 공통의 발명품과 고봉, 한글 자모 ㄹ, 윷놀이 등 무형 문화와 호랑이, 논길, 박과 같은 자연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63가지 유무형의 자산에 대해 소개한다.

저자는 대대로 손때가 묻어온 물건에서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탐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물건이 갖는 상징성과 이데올로기적 메시지, 도덕성을 포착한다. 사전에서도 역사책에서도 읽을 수 없는 독창적인 문화 해석은 도구에 담긴 한국인의 모습과 생각, 혼과 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동서양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창조적 상상력과 자유로운 사고방식은 우리를 문화 문맹에서 벗어나게 하고, 무의식에 잠들어 있던 한국인의 마음을 되살아나게 한다.

특히 15년간 수많은 독자에게 한국 문화의 길잡이가 되어준 책으로 미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이어령 글쓰기의 장점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저자가 이끄는대로 생각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문화에 관한 몇 가지 핵심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융합과 생명, 융통성 등이 그것이다. 융합은 대립과 모순을 중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아름다움이 태어난다. 바구니는 노동과 놀이를 통합한 도구이고, 장독대는 볕과 바람이 들되 은밀한 곳이어야만 하는 조화의 공간이다. 키는 곡식을 모으는 동시에 쭉정이를 날리는 모순적인 기능을 융합함으로써 아름다운 모양새를 갖추고, 베갯모에서는 십장생이 서로 어우러지는 화합의 세계가 펼쳐진다.

날이 안으로 향한 낫과 호미도 풀을 베는 기능을 넘어서 때론 자기를 향한 경고의 칼날이 된다. 수저는 개인주의의 산물인 서양의 포크, 나이프와 대비되며 한국의 소통 문화를 대표하는 기물이 된다. 생명 또한 투쟁과 정복이 아닌 포용의 소산물이다.

한국 논길의 구불구불한 모양은 지극한 정성이 필요한 벼농사가 만들어내는 생명적인 곡선이고, 종소리는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는 영혼이다. 정확한 치수를 재지 않고 넉넉하게 만든 한복 바지와 치마는 몸에 맞춰 입는 신축자재성이 특징이고, 보자기는 쓰임에 따라 가방이 되기도 하고 두건이나 끈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사물과 풍속의 세계를 탐험하다 보면 우리의 심상은 과거의 들판으로, 초가집 지붕 위로, 겨울밤 화롯가로, 꿈과 몽상의 자리로 옮겨간다. 잊혀졌던 것들을 되살리고 평범한 사물을 한국인의 혼과 마음이 담긴 특별한 물건으로 만든 그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 그리운 지금이다.

이용환 기자 yhlee@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