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聖 '초의선사', 민멸 위기 처했던 한국의 전통차 중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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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획
茶聖 '초의선사', 민멸 위기 처했던 한국의 전통차 중흥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차이 나는 남도-중국 인연자원⑩ 차선고도(茶船古道)와 동다송(東茶頌)||차, 중국인들이 마실거리 가운데 으뜸으로 쳐||보이차, 홍차, 자스민차 등 명차만 2백여 종||무안 출신 茶聖 초의선사, 한국차 다도 정립||대흥사 경내 일지암 짓고 ‘선과 차’ 연구 정진||다신전·동다송 등 수많은 저술통해 이론 확립 ||다도 성지 무안 다성사에서 매년 헌다례 올려
  • 입력 : 2022. 10.26(수) 16:37
  • 최도철 기자

초의선사가 40년 동안 선과 차에 관한 연구에 정진했던 해남 대흥사 일지암(一枝庵). 해남군 제공

비단길보다 먼저 생긴 무역로, 차마고도(茶馬古道)는 마방(馬幇)들이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사고팔기 위해 지나다닌 길이다. 이와 유사한 의미의 차선고도(茶船古道)가 있다. 중국으로부터 뱃길을 통해 여러 나라와 연결된 차도(茶道)를 말한다.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남도-중국 인연자원 시리즈 열 번째로 차선고도와 민멸 위기에 처했던 한국의 전통차를 중흥한 다성(茶聖) '초의선사'를 싣는다.

일지암 물돌확

조선 영조 36년인 1760년, 승정원일기에 예사롭지 않은 기록이 실린다. 고군산진에 표착한 중국 절강 상인의 배에 황차(黃茶)가 가득 실려 있었다는 내용이다.

18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의 해금정책이 풀리자, 중국의 서남해안에 북상하는 항로가 새로 개설됐다. 마방(馬幇)들이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사고팔기 위해 지나다닌 차마고도(茶馬古道)처럼 뱃길을 통해 중국의 차들이 여러 나라로 운반되는 해상무역로가 열린 것이다. 이를 차마고도에 빗대 본보에 오랫동안 남도인문학의 진수를 알려온 해양민속학자 이윤선은 차선고도(茶船古道)라 추정한다. 실제 중국 오주시 창오현 육보진에서 생산해 배(船)를 통해 세계로 운반했던 오주 육보차(梧州 六堡茶)도 차선고도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청(靑)의 해금정책 이후 배를 통한 물류의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서남해 연안에 중국 상선의 표착이 부쩍 늘어났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중국 황차 무역선도 그런 경우다.

중국배에 실린 황차의 기록은 한양대 정민 교수의 저서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에도 나온다. 정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이덕리의 '다설'에 남긴 기록을 주목하고 있다. "경진년(1760, 영조36)에 차 파는 상선이 와서 온 나라가 그제야 차의 생김새를 처음으로 알았다. 이후 10년간 실컷 먹고 떨어진 것이 하마 오래되었는데도 또한 채취해서 쓸 줄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사람에게 차는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이 못 됨이 분명하다. 비록 물건을 죄다 취한다 해도 이익을 독점한다는 혐의는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이외에도 중국 황차 무역선 기록은 실학자 박제가가 쓴 '북학의'에도 기술되어 있다.

차는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마실거리 가운데 으뜸이다. 그래서 중국의 차는 역사도 유구하고 종류도 엄청나게 다양하다. 중국은 당나라때부터 이어진 차문화가 있어 현재까지도 자기 취향에 맞는 찻잔이나 차를 가지고 다닐만큼 차를 사랑한다. 중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차는 보이차, 녹차, 홍차, 자스민차 등이 있고, 명차 종류도 200여종이 넘는다.

우리나라에도 다례인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꼽히는 인물이 있다. 조선 후기의 학승이며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다, 법명은 의순(意恂)이지만 법호인 초의(草衣)가 더 잘 알려졌기에 보통 초의선사라고 부른다.

초의선사 탄생지

초의선사는 1786년(정조 10년)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나 해남 대흥사에서 선수행과 함께 선문사변만어, 초의선과, 동다송, 다신전, 진묵조사유고, 대둔사지, 일지암문집, 초의시고 등 당대 불교사상과 문화 관련 책을 저술하고, 1866년 해남 일지암에서 세수 81세, 법랍 66세로 입적했다.

초의선사는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 정약용,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 김정희, 조선 제일의 시인인 신위, 정약용의 둘째아들인 농가월령가의 저자 정학유,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 남종화의 대가인 허유 등과 교우하며 조선 후기의 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차는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불가의 학승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용맹정진하는 수행승에게 있어 차의 음용은 단순히 맛의 추구가 아니었다. 치열한 수행을 위한 보조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숭유억불 정책이 펴지면서 다도도 쇠퇴해 민멸의 위기를 맞았다.

쇠락의 위기에 처했던 한국의 전통차를 중흥시킨 이는 초의선사다. 선사의 각별한 차 사랑은 한국차에 대해 지은 7언 송시(頌詩) 동다송(東茶頌)을 통해 잘 나타나 있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 차가 월(중국 절강성, 옛 越나라) 나라 차만 못하다고 하나, 우리나라 차는 색과 향과 기운과 맛이 조금도 그만 못하지 않다고 정다산(丁茶山)의 동다기(東茶記)에 기록되어 있고 또 다서(茶書)의 기록에도 육안(陸安, 중국 육안현) 차는 맛이 좋고 몽산(蒙山, 중국 사천성) 차는 약이 된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차는 맛과 약 두 가지를 겸하고 있다. 여기 만약 이찬황(李贊皇, 중국의 유명한 茶人)이나 육자우(陸子羽, 다경(茶經)의 저자)가 있다면 내 말을 믿을 것이다.'라고 우리나라 차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초의선사는 해남 대흥사 경내에 일지암(一枝庵)이라는 초암을 짓고 40년 동안 선과 차에 관한 연구에 정진했다. 선을 수행하는 것과 차를 마시는 것을 일치시켜 차를 마시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이른바 다선일미(茶禪一味)이다. 선사는 또 승려로서 범패에도 능했으며, 그림을 잘 그려 사찰 대부분 불화와 탱화를 그렸다.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초의선사기 일지암을 짓고 쓴 시)

초의선사는 선(禪)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침체되어 있던 불교계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특히 차는 물론 원예에도 조예가 깊어 대흥사에서 직접 차를 기르며 종자를 개발했다. 명맥만 유지되어 오던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정립하여 '시서화다-사절((詩書畵茶-四絶)'이라고 불렸다. 또한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을 비롯해 수많은 저술을 통해 다도의 이론을 확립했다.

'옥화 한 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동다송 제16송).

초의선사 헌다례. 무안군 제공

초의선사

초의선사 탄생지 동다송 시비앞에서 외국인들이 차를 시음하고 있다. 무안군 제공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