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었던 '노인 이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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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낯설었던 '노인 이동권'
  • 입력 : 2022. 11.13(일) 16:19
  • 정성현 기자
정성현 기자
"워매~ 이런 것도 취재해준다요. 안 그래도 말하고 싶었는디 잘 됐네. '노인들이 걷기 불편하다, 힘들다' 혼자 맨 떠들어 대도 개선되지가 않더라고~ 이참에 좀 다 바뀌었으면 좋겠네잉."

지난 8일 광주 동구 소태역 인근에서 만난 한 노인은 기자에게 읍소하듯 불만사항을 털어놨다. 당시 '보행자의 날(11월11일)'을 앞두고, 사전 취재를 하던 중이었기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노인은 손으로 지하철역사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대중교통이 대중(大衆)을 위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불특정 다수 누구나 쉽게 이용이 가능한 시설이어야 하지만 '노인·장애인 등 특정 소수는 심한 불편함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노인을 따라 역사 주변을 살펴보니, 실제 이곳은 교통약자가 다니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편의·안전성이었다.

이곳 역사에는 총 4개의 출구가 있는데, 엘리베이터는 1번 출구에만 설치돼 있다. 1번 출구와 2·3번 출구 사이는 250m 가량 떨어져 있어, 다른 출구 이용객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도 한참을 걸어야 한다. 역사 밖으로 가기 위한 에스컬레이터 등 다른 편의 시설은 없다.

지상에서 출구와 출구를 오가기 위해서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 등 교통약자가 걷기에는 위험한 부분이 많았다. 이에 많은 이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계단을 이용하고 있다.

노인은 이곳 역사 뿐만 아니라 다른 곳들도 비슷한 상황이 많다고 했다. 취재 결과, 실제 서구 돌고개역 등지에서도 엘리베이터 이용 후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위험천만한 횡단보도 여러 개를 건너야 했다.

'횡단보도' 역시 또 다른 문제다. 이날 만난 노인들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광주 동구 학동의 한 6차로에서 만난 한 노인은 횡단보도 녹색등이 빨간등으로 바뀌고 약 2초가 더 지나서야 도로를 온전히 건널 수 있었다. 그는 횡단보도를 다 건넌 후 잠시 놀란 몸과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광주경찰에 따르면, 횡단보도의 녹색 점등 시간은 일반 성인이 1초에 1m를 이동한다고 가정하고 설계됐다. 그러나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가 '만 65세 이상 노인들의 건강 상태'를 연구한 결과, 노인의 평균 보행 속도는 1초에 약 0.7m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횡단보도 초록 점등 시간은 노인들에게 턱없이 짧다는 의미다.

노인은 "녹색등 신호가 1초 줄어들 때마다 속이 타고 오싹해진다"며 "아무리 빨리 걸어 신호에 맞게 건널 수가 없다. (신호가) 조금이라도 더 여유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밝혔다.

취재를 시작하기 전에는 '노인 이동권'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다. 어쩌면 처음 들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기준'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살아왔던 나머지, 주변의 것들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기자로서 다양한 시각을 갖지 못했던 지난날을 호되게 자책한다.

다행히 광주시는 교통약자 보행 등을 중장기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올해 '보행환경 기본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 이 계획은 이르면 내년께부터 시행돼 보행환경 개선 등이 이뤄질 전망이다.

사회복지 전문가에 따르면, 한국은 고령화 가속도 세계 1위 나라다. 그럼에도 이를 고려한 정책·시설·인식 개선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행정당국 등에서 보행 약자를 위한 다양한 고민과 그에 따른 개선책 등이 꾸준히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정성현 기자 j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