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90>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나'만이 아닌 '조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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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90>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나'만이 아닌 '조국'이 있었다
월드컵으로 소급해서 본 여행일지-산티아고 순례길(포르투갈 길)에서 만난 열정과 냉정 사이
  • 입력 : 2022. 12.01(목) 15:47
  • 편집에디터
순례자 레스토랑. 차노휘

11월 28일 밤이었다. 노이즈캔슬링 헤드셋을 끼고 논문을 읽고 있는 내 귀에도 환호성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옆 연구실인지 맞은편이지 아니면 위층인지 아래층인지, 전 층인지 그 소리는 멀면서도 가까웠고 갑작스럽다가도 잠잠했다. 직접 경기를 보고 있지 않던 나는 인터넷에서 현재까지의 경기 내용을 검색했다. 초반에 두 골을 내주고는 후반전에서 동점골(2:2)을 만들어 낸 직후였다. 급격히 기온이 떨어졌던 월요일 밤, 낮 동안 간간이 내리던 비가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 굵기를 더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팀은 상대팀에게 한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경기 종료까지 몇 분 남지 않은 상황인 자정 7분 전에 난데없이 화재경보가 울렸다. 위이잉, 위이잉….

그날 화재가 난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는 날, 아주 가끔 화재경보기가 오작동을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직원들이 다 퇴근한 깊은 밤이나 이른 아침 시간대에 그럴 확률이 더 높았다. 하필이면 마지막 반전을 기다리며 피 말리는 초를 세는 시간에 화재경보기가 울릴 게 뭐람! 흡사 가나 전의 경기 결과를 예감한 듯 말이다. 아직 희망은 있다. 오늘 자정, 16강 진출을 위한 마지막 경기가 남아있다. 이렇듯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은 나도 월드컵이 얼마나 세계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지'경험 삼아 잘 알고 있다.

순례길 곳곳에 있는 이벤트 장소. 차노휘

4년 전인 2018년이었다. 그때 나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도상거리 700km)를 향해 걷고 있었다(잘 알다시피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대표적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이 총 4코스가 있는데 '프랑스길'을 이미 완주했기에 '포르투갈길'을 도전하고 있었다. 다음 2회에 걸쳐서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소개할 참이다). 매일 배낭을 메고 20~30km를 더위 속에서 걸어야했다. 유럽의 여름은 눈부시도록 화창했고 건조했다. 길 중간 중간 순례자들을 위한 바(Bar)가 있었다. 그곳에서 발을 쉬면서 탄산음료나 커피를 마시는 것이 큰 낙이었다. 대부분의 순례길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한 시골길이었다.

걷기 시작한 지 며칠 지난 6월 18일. 나는 '산타렝'이라는 시골 마을 초입에 있는 동네 바에서 커피 한 잔과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있었다. 막 나가려는데, TV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먼 이국땅에서 듣는 애국가는 내 발목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다시 주저앉아 맥주 한 병을 더 주문하고는 노트북까지 켰다. 그동안 외면했던 TV 모니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한 두 시간 정도 늦게 출발한다고 해서 큰일 날 일은 없었다. 월드컵이라고 해서 일일이 경기를 다 확인하고 그 결과를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순례자들. 차노휘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신태용 감독이 대표팀을 맡아 독일, 멕시코, 스웨덴과 함께 F조로 배정. 한국은 스웨덴과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스웨덴에게 한 골을 허용했다. 이어진 2차전에서는 멕시코와 맞붙었지만 2-1로 졌다. 마지막 경기인 독일 전에서 후반 인저리 타임에 두골을 넣어 2-0으로 승리했다.

내가 그때를 기억하는 것은 그 마지막 게임 때문이었다. 월드컵 본선 사상 아시아 팀 최초로 독일을 상대로 시원하게 승리를 거둔 국가가 한국이라는 나라였다. 조 3위로 조별리그를 마쳐 16강 진출은 좌절되었지만 유럽 사람들은 그 경기를 인상 깊게 본 듯했다. 내가 지나가면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고 South Korea라고 말하면 엄지부터 세우기 시작했다. 6월 28일에는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그 앞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현지인에게 맥주까지 얻어마셨다. 2018년 6월 16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마무리하고 바르셀로나로 향하기 위해서 항공권을 발급받았을 때에도 리셉션 직원이 내 여권을 보고는 멋지다고 했다. 항공권이 기차요금보다 싼 대신 짐 무게를 아주 까다롭게 체크하는 '라이언 에어'였는데, 공항 직원의 한 마디는 내 긴장을 풀어주었다. 밑도 끝도 없이 '멋지다'라는 말에 독일을 이겨서 그러냐고 되물으려고 했지만 줄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고맙다는 말만 했다.

환대받은 기분을 느낀 것은 2021년 여름 두 달 동안 뉴욕에 있을 때도 그랬다. 팬데믹 동안 K방역이 성공적이어서인지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어디든 출입을 허용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몸을 가지고 나 혼자 여행할 뿐인데도, 원주민들은 나를 보면서 '한국'까지 떠올렸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결국 '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향(조국)을 떠난 타지에서 더 실감했다. 외국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는 말 또한 이런 연유에서 나온 것일까. 자랑스러움도 부끄러움도 배가 되어 다가오는 것?

순례자 여권에 스탬프 찍기. 차노휘

2022년 월드컵 경기를 치르는 동안 4년 전의 나처럼 타지에서 '국적지'와 한 묶음으로 '나'를 평가받는 여행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단 스포츠만으로 국한 된 것은 아니지만 금요일 자정 대망의 포르투갈 전이 바로 앞에 버티고 있어서 언급할 수가 없다. 강한 자에게 더욱 강한 한국인만의 기질을 잘 알기에 쉽사리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어떤 경기보다 더 뜨거울 것이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시아의 최강 팀인 이란이 16강 진출에 좌절되어 귀국했는데도 이란의 국민들이(일부이기는 하지만)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하행사를 벌인 것에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조국의 패배에도 월드컵이 정권 선전의 기회가 되지 않은 것에 만족감을 표"했다고 말했다. 너무 매력적인 것은 간혹 '밝은 눈'을 가린다는 말을 그들이 신뢰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곳 또한 '냉정과 열정'이 여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직 이태원 참사 원인 규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산타렝 동네 바에서 월드컵 보기. 차노휘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