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5·18 43주년> 대한민국 ‘민주주의 횃불’로 타오른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핏빛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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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 5·18 43주년> 대한민국 ‘민주주의 횃불’로 타오른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핏빛 현장’ 
5·18 사적지 - 광주
18일 계엄군과 첫 충돌한 ‘전남대 정문’
계엄군 만행 시외 퍼진 ‘옛 공용터미널’
통곡과 애도… 주검 안치된 ‘옛 상무관’
시민공동체 중심 최후 항전지 ‘옛 도청’
무자비 고문·구타 행해진 ‘상무대 옛터’
버스에 무차별 총격 ‘주남마을 학살지’
  • 입력 : 2023. 05.17(수) 14:12
광주시와 전남도가 5·18 민주화운동 관련 사적지를 각각 32곳·29곳을 선정, 관리해 오고 있다. 많은 이들은 80년 5·18민주화운동 하면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과 광장, 전일빌딩, YMCA·YWCA, 전남대 정문 정도만 기억하고 있다.

5·18 43주년을 맞아 이돈삼 광주·전남 5·18 사적지 안내·역사 해설사의 도움으로 5·18 사적지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전일빌딩 (3)
●사적1호 전남대학교 정문 (북구 용봉로77)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80년 5월 18일 오전 10시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이,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 항의하면서 첫 충돌이 일어났다. 5·18항쟁의 신호탄이었다. 발걸음을 돌린 학생들은 광주역과 금남로로 나아가 시위를 벌였다.

광주교도소 (2)
●사적2호 광주역 광장 (북구 무등로235)
분노한 시민과 계엄군이 충돌하며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다. 5월 20일 밤, 광주역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을 향해 총을 쐈다. 여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튿날 아침 주검 2구가 발견됐다. 시민들은 이 주검을 앞세우고 금남로로 진출했다.

●사적3호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동구 제봉로225)
계엄군의 만행이 자행된 곳이다. 19일 오후 계엄군이 터미널 대합실과 지하도까지 난입하며 총칼을 휘둘렀다.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과 시민들의 항쟁 소식이 버스를 타고 시외로 전해졌다. 민주화운동이 전남 전역으로 퍼졌다.

광주역 (1)
●사적4호 금남로 (동구 금남로221)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날마다 격렬하게 맞선 항쟁의 거리다. 5월18일 가톨릭센터 앞에서 최초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다. 20일 버스·택시가 함께 한 대규모 차량시위 행렬이 거리를 누볐다. 항쟁 이후 5·18 진실을 밝히려는 투쟁도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남동성당
●사적5-1호 옛 전남도청 (동구 문화전당로38)
항쟁의 본부이면서 최후의 격전지였다. 시민들은 날마다 ‘가자 도청으로’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21일엔 시민들이 도청에서 계엄군을 몰아냈다. 이후 도청은 항쟁지도부와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공간으로 쓰였다. 시민공동체의 중심이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이 계엄군의 총칼에 쓰러진 곳이기도 하다.


주남마을
●사적5-2호 5·18민주광장 (동구 금남로1가41)
우리나라 민주화의 산실이다. 5월14~16일 학생과 시민들은 이곳 분수대를 연단 삼아 민족민주화성회를 열었다. 항쟁 기간엔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하며 민주화를 요구했다. 21일엔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계엄군을 몰아낸 22일부터 분수대 앞에 시신을 안치하고 시민대회를 열었다.


들불야학 (3)
●사적5-3호 옛 상무관 (동구 문화전당로38)
희생자의 주검이 안치됐던 통곡과 애도의 공간이다. 상무관 앞에 설치된 분향소에는 시민들이 줄지어 분향하며 희생자의 넋을 기렸다. 아버지의 영정을 든 어린아이의 사진도 여기에서 외신기자에 의해 찍혔다. 아들 조천호가 아버지 조사천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건축업을 하던 조사천은 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 때 총을 맞았다.

●사적5-4호 광주YMCA (동구 금남로246)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자위 수단으로 시민군들에게 총기 조작법을 알려준 곳이다. 26일엔 민주인사들이 모여 김성용 신부를 김수환 추기경한테 보내 광주의 실상을 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성용 신부는 오후 4시 광주를 벗어났다. 27일 최후 항전 때 계엄군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붙잡힌 곳이다.

●사적6호 광주YWCA 옛터 (동구 중앙로196번길31-6)
유인물 제작과 배포, 궐기대회 물품 제작, 모금운동 등을 편 곳이다. ‘투사회보’ ‘민주시민회보’ 등을 통한 항쟁소식 전파도 여기서 이뤄졌다. 이 건물에 있던 신협 관계자와 들불야학 청년들이 회보를 만들었다. 항쟁 마지막 날인 27일 계엄군에 의해 시민군 여러 명이 희생됐다.

●사적7호 광주MBC 옛터 (동구 제봉로145)
20일 밤,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방송국이 불에 탔다. 시민들은 항쟁의 진실을 보도하기는커녕, 시민을 폭도로 매도한 데 대해 분개했다. 신군부에 의해 통제된 언론은 시민의 항쟁 소식 보도를 철저히 외면했다. 이튿날 새벽엔 KBS와 세무서가 불길에 휩싸였다.

●사적8호 녹두서점 옛터 (동구 제봉로134)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파는 서점이었다. 청년·학생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격문과 현수막 제작 등 민주화 촉구 궐기대회를 준비했다. 광천동의 ‘들불야학’ 강학과 노동자들이 이 서점을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투사회보’를 제작·배포했다.

<>●사적9호 전남대학교병원 (동구 제봉로42)
부상자를 헌신적으로 치료하며 의료인의 참모습을 보인 곳이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노력을 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헌혈 행렬도 병원 밖까지 이어졌다. 5·18민주화운동의 ‘야전병원’으로 통한다.


<>●사적10호 광주기독병원 (남구 양림로37)
부상당한 시민을 헌신적으로 치료해 준 의료현장이다. 부상자 치료를 위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헌혈에 동참하며 민주시민의 뜨거운 열정을 보여줬다. 항쟁 이후에도 부상자들을 가족처럼 치료하며 돌봤다.


무등경기장정문
●사적11호 옛 광주적십자병원 (동구 천변우로415)
항쟁의 중심지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돌봤다. 부상자 치료를 위한 피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시민들의 헌혈 행렬이 줄을 이었다. 인근 유흥업소 종사자들도 헌혈에 참여하며 뜨거운 시민정신을 보여줬다.


민주광장과도청 (4)
●사적12호 조선대학교 (동구 필문대로309)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함께 내려온 계엄군의 땅이 됐다. 계엄군은 학교에 머물며 생활했다. 18~21일엔 시내에서 붙잡혀 온 시민과 학생들을 체육관, 야전막사 등에 가두고 무자비한 폭행을 일삼았다.


●사적13호 배고픈다리 일대 (동구 의재로77)
지금의 홍림교를 일컫는다. 당시 모범적으로 지역을 지킨 본보기다. 21일 조선대 뒷산으로 올라간 계엄군에 맞서기 위해 지역주민들이 시민군을 편성하고 이 다리를 중심으로 방어망을 구축했다. 22일 밤엔 산에서 내려오던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이며 물리쳤다.


상무대 (5)
●사적14호 주남마을 민간인 학살지 (동구 주남길10)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계엄군은 23일 주남마을을 지나 화순 방면으로 가던 미니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버스에 탄 승객 15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부상자 2명은 마을 뒷산으로 끌고가 총살하고 암매장했다. 암매장 시신은 5·18 이후 주민 신고로 발굴됐다.


<>●사적15호 광목간 민간인 학살지 (남구 송하동538-1)
계엄군이 무고한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한 곳이다. 계엄군은 24일 원제·진월마을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친구들과 함께 놀던 초등학생,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학생한테도 정조준을 했다. 같은 날 계엄군끼리 오인 사격으로 동료들이 죽고 다친 데 대한 분풀이였다.

상무대 (8)
●사적16호 농성광장 격전지 (서구 농성동671-2)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이 시내로 들어오던 계엄군을 돌려세운 곳이다. 26일 아침 계엄군이 시내 진입을 시도한다는 소식을 들은 수습위원들이 농성광장까지 나가 맨몸으로 막았다. 죽음을 불사한 행진이었다. 계엄군은 농성광장 인근 주택가에 총격을 가해 무고한 시민을 죽였다.

적십자병원 (3)
전남대병원 (3)
●사적17호 상무대 옛터 (서구 상무평화로13)
당시 계엄사령부 전남북 계엄분소가 설치된 곳이다.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이 계엄군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항쟁 기간 시민 3000여명이 붙잡혀 와 이곳 헌병대 영창에 갇혔다. 시민들에게는 상상을 뛰어넘는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가 행해졌다.

<>●사적18호 무등경기장 정문 (북구 서림로9)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격분한 운전기사들이 모여 항쟁 참가를 선언하고 20일 차량 시위를 시작한 곳이다. 운전기사들은 대형버스와 택시를 몰고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로 향했다. 차량 시위는 시민들에게 강한 연대 의식과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다.


●사적19호 양동시장 (서구 천변좌로238)
함께 사는 대동세상, 광주공동체의 본보기를 보인 곳이다. 시장 상인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제공하며 응원했다. 부상자를 치료하는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한테도 주먹밥을 나눴다. 치료약품과 생필품도 제공하며 시민과 하나가 됐다.

●사적20호 광주공원 광장-시민군 편성지 (남구 중앙로107번길15)
시민군을 편성하고 사격 방법을 서로 알려주고 익힌 곳이다. 시민들은 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광주 인근의 시군에서 총과 탄약을 가져왔다.

●사적21호 5·18 최초 발포지 (동구 중앙로282)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을 향해 처음 총을 쏜 곳이다. 5월19일 시위대에 둘러싸인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발포를 했다. 김영찬(조대부고 3년) 군이 총상을 입었다.

●사적22호 옛 광주교도소 (북구 동문대로261)
계엄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담양·순천 방면으로 이동하던 차량과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무고한 시민들을 끌고 와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계엄군은 희생자의 시신을 인근 야산에 암매장했다. 암매장 시신은 5·18 직후 발굴됐다.

●사적23호 옛 광주국군병원 (서구 상무대로1028)
계엄군의 폭행과 고문으로 부상을 당한 시민들이 강제로 치료를 받은 곳이다. 의료진들은 환자 상태를 거짓으로 보고하며 시민들이 보안대로 다시 끌려가는 것을 막기도 했다. ‘통합병원은 천국, 보안대는 지옥’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사적24호 5·18 옛 묘지 (북구 민주로285)
항쟁 기간 희생된 영령들이 묻혔던 곳이다. 신군부는 희생자들을 ‘폭도’라 부르며 별도의 장례식도 없이 리어카와 청소차에 실어 와 매장했다. 1997년 국립5·18민주묘지가 조성되고 희생자들은 민주묘지로 옮겨 안장됐다. 희생자들의 가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적25호 남동성당 (동구 제봉로67)
주임신부를 포함한 민주인사 12명이 모여 수습대책을 논의했던 곳이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광주 상황을 전달하는 창구 역할도 했다. 2005년 ‘5·18기념성당’으로 명명됐다. 지금도 매년 5월 추모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사적26호 505보안부대 옛터 (서구 상무대로956번길16)
5·18 시나리오를 만들고 실행한, 실질적인 지휘본부였다. 비상계엄이 확대되기 이전부터 민주인사들을 잡아들였다. 사전에 시나리오를 짜 놓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다.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왜곡·조작하기 위해 시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도 일삼았다.

●사적27호 들불야학 옛터 (서구 죽봉대로119번길28-13)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투사회보’를 만들던 곳이다. 항쟁을 이끈 들불 7열사 산실이다. 건물은 당초 광천동성당의 교리실이었다. 78년7월 시작된 들불야학이 사용했다. 김영철·윤상원 등은 바로 옆 시민아파트를 임대해 살며 사회운동을 했다. 건물은 2004년 부분 철거되고 입구 벽체만 남았다.

●사적28호 전일빌딩 (동구 금남로245)
힌츠페터 등 국내·외 기자들이 옥상에서 계엄군의 잔혹상을 촬영한 건물이다. 21일 같은 자리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다. 1층 대한항공 셔터 자리에는 투사회보와 대자보 등이 붙여졌다. 21일·27일 공중헬기로부터 수백 발의 총격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사적29호 고 홍남순 변호사 가옥 (동구 제봉로153)
재야 민주인사들이 모여 토론하고 회의했던 집이다. 홍남순은 남동성당에서 열린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했다. 26일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막은 죽음의 행진에도 나섰다. 이후 5·18진상 규명운동에도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