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남도의 씻김굿 ‘길닦음 거리’로 본 제망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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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남도의 씻김굿 ‘길닦음 거리’로 본 제망매가
346. 제망매가(祭亡妹歌)의 재해석
제망매가만큼 사랑받는 향가는 없을 것이다. 숱한 사람들이 애송하였고 숱한 연구자들이 해석하였다. 어떤 한두 가지 말로 온전히 온전히 형용할 수 있으며 어떤 한가지 이론만으로 해명할 수 있겠는가
  • 입력 : 2023. 05.18(목) 12:26
진도 상여소리 중 호상꾼들의 길베. 도읍 수역리, 2001. 이윤선
죽고 사는 길이/ 여기 있으니 두려워하고/ 그대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낙엽처럼/ 같은 나뭇가지에서 나고/ 가는 곳 모두어지누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는/ 길 닦으며 기다리리/ -제망매가 전문-(기왕의 번역을 이윤선이 일부 수정함). 제망매가만큼 사랑받는 향가는 없을 것이다. 숱한 사람들이 애송하였고 숱한 연구자들이 해석하였다. 충담사의 찬기파랑가와 더불어 우리 문학의 정수라 아니할 수 없으니, 어떤 한두 가지 말로 온전히 형용할 수 있으며 어떤 한가지 이론만으로 해명할 수 있겠는가. 문구마다 해석이 다르고 글자마다 낱말을 달리 번역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제망매가를 거듭 말하려는 것은 논란을 부추켜 학문의 세계를 어지럽히려 함이 아니다. 허튼 꾀를 낸다고 나무라는 이들을 환영하며, 활발한 논쟁의 자리가 마련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삼국유사』 「월명사 도솔가」조의 내용이 대강 이러하다. 월명사가 「도솔가」조를 짓기 전에 죽은 누이를 위하여 사십구재(四十九齋)를 올리면서 「제망매가」를 지어 불렀다. 불교적으로 재(齋)이니 풀어 말하면 제(祭)이다. 제망매가(祭亡妹歌)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가 이것이다. 노래를 부르던 중이었던가 아니면 다 부르고 나서던가 갑자기 바람이 불어 지전(紙錢)이 서쪽으로 날아갔다. 이를 두고 여러 연구자가 말하기를 신비스런 주술의 현상이라 했다. 서쪽으로 날아간 것을 극락이나 중천(中千) 등의 이상적인 세계로 나아간 것으로 보고 어떤 신비스런 힘이 지전을 날게 하여 그 이면을 실천했다는 뜻일 것이다.

지전이 날아간 주요한 원인은 월명사가 지어 부른 「제망매가」라는 노래이다. 이 노래가 천도(薦度)에 대한 노래라는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하다. 월명사의 신이한 행적으로 이를 설명해왔다. “경덕왕 19년 사월 초하룻날에 두 해가 나타나서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인연 있는 스님을 청해서 공양하며 공덕을 닦으면 재앙이 물러날 것이다. 조원전(朝元殿)에 단(壇)을 설치하고 인연 있는 스님을 기다렸다. 때마침 월명사가 밭 사이를 지나 남쪽 길로 가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오게 하고 단을 열어 기도문을 짓도록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월명사는 항시 사천왕사에 머물러 지냈는데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대문 앞의 큰길을 지나치는데 달이 그를 위해 운행을 멈추었다. 이 인연으로 하여 그 길을 월명리(月明里)라 했고 그의 이름을 월명사라 했다.” 월명사는 예(羿)처럼 해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달의 운행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이런 영력이 있으니 누이의 죽음에 노래를 불러 극락왕생시키는 일은 예사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장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퍼뜩 떠오르는 게 아니라 매우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풍경이다. 진도 혹은 남도 전역의 상장례 풍경이다. 나는 이 풍경에서 노래(呪文)와 지전(紙錢)과 길(道)을 핵심 코드로 뽑아내고 근자의 풍속으로 옮겨 설명했다. 차차 그 내력을 밝힌다.



‘누이’의 범주와 ‘같은 나뭇가지’에 대한 시선



<신재홍, 『향가의 해석』, 집문당, 2000, 209~222쪽>의 논의에 의하면, “ᄒᆞᄃᆞᆫ 가자 나고/ 가논 곧 모다온뎌!”로 풀이한다. 신재홍은 이를 「<유리창>과 <제망매가>의 비교 고찰>」(독서연구, 제34호, 2015)에서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사방팔방이구나!”로 풀이했다. 기왕의 “한 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류의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나는 이를 “같은 나뭇가지에서 나고/ 가는 곳 모두어지는데”로 고쳐 풀이한다. 바로 잇는 노랫말이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는~”이라는 점에서 이 풀이가 유효하다. “(죽은 누이가) 가는 곳을 모르는 것”과 이어지는 “미타찰에서 만날 나”의 목적과 행방이 충돌한다는 점을 상기한다. 다음 행에 이미 서방정토인 미타찰(彌陀刹)이란 만날 장소가 적시되어있는데, 바로 앞 행에서 왜 가는 곳을 모른다고 풀이했을까? 신재홍이 인용한 “가는 곧 모다온뎌!”는 그런 점에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향가 원문을 향찰 방식으로 읽어보고 ‘모으다’의 남도말이 ‘모태다’인 것을 상고한다. 내 방식으로 풀어 말하면 “같은 나뭇가지에서 나고/ 가는 곳 모태지는데”이다. 그래야 사후에 이른다고 하는 불교적 천계의 설정이 유효하게 된다. 마치 우리 민족이 한뿌리라는 언설과 내통한다고나 할까. 죽은 너와 나는 같은 뿌리, 같은 가지에서 태어났으며 가는 곳이 미타찰이라는 목적지로 매양 한가지라는 고백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 바쁘길래 가을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낙엽처럼 먼저 가버린단 말인가 하고 토로하고 있다.

또 하나는 ‘누이’의 설정이다. 이것이 형제간의 누이만을 말하는 것인가? 누이(妹)와 ‘한 가지’라는 형용 때문에 대부분 형제로 풀이하거나 근친의 은유로 풀이한다. 이 논의를 그대로 수용해야 할까? 박형준의 글 <「제망매가에 형상화된 ‘나뭇가지’ 이미지의 현대적 변용」(한국문예비평연구 제49집), 2016>을 참고한다. 기형도의 시편을 분석했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기형도, 「노인들」 전문(『기형도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나는 기형도의 시를 들어 나뭇가지와 누이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제안하였다. 이 글은 한국학호남진흥원 이메일 칼럼 두 번째 편에 ‘길닦음’의 행로, 제망매가(祭亡妹歌)로부터-라는 제목으로 풀어써 두었다. 내용이 길기에 여기 다 옮지 못하나, 기회를 엿봐 ‘길닦음’까지 포괄해 소개하겠다.



남도인문학팁

제망매가의 ‘한 가지’와 기형도의 ‘추악한 가지’



기형도의 나뭇가지들은 제목에서 드러낸 것처럼 노인들 전반에 대한 형용이다. 박형준은 이를 ‘산나뭇가지’와 ‘죽은 나뭇가지’의 은유를 통해 죽은 누이의 서방정토 왕생을 형상화했다고 풀이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기형도의 다른 시에 나타나는 나뭇가지는 누이와 나와의 관계랄 수 있지만 「노인들」의 나뭇가지는 그렇지 않다. 제망매가의 가지와 견주니 사람의 갈래를 나타내는 기호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다. 오히려 한용운의 ‘님’이나 수많은 시인이 노래한 ‘연인’에 가깝다. 내가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을 ‘누이’로 호명하는 것일 뿐이다. 손아래 동생, 나이 어린 동생, 누이(妹)의 호명 방식을 더 깊이 추적해야 한다. 기형도가 말하는 ‘목을 분지르며 떨어져 나간 나뭇가지’와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을, ‘죽은 자’와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의 대칭으로 읽는 시선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하던 그대 ‘누이’는 미처 가을이 깊기도 전에 ‘목을 분지르며 떨어져’ 나갔는데, 살아남은 나는 추악하게도 ‘부러지지 않고’ 연명하고 있다. 그러하니 어찌 애가(哀歌)와 비가(悲歌)를 불러주어 그대 내 사랑하는 이가 왕생극락하기를 주문(呪文)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형도는 비록 노인에 빗대었으나 제망매가에 다시 견줄 기회를 내게 제공해주었다. 장차 ‘누이’를 보통의 나이 어린 여자, 내가 죽도록 사랑했던 ‘그대’의 기호로 읽어낼 수 있게 해주었다. 「제망매가」는 적어도 이런 시선으로 읽어야 불교적 세계관도 해명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남도의 씻김굿, 그중에서도 길닦음 거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