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서홍원> 영웅의 눈물 -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세 번째 이야기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테마칼럼
[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서홍원> 영웅의 눈물 -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세 번째 이야기
서양 고전 및 영국문학의 전통(4)
서홍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 입력 : 2023. 05.24(수) 16:55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킬레우스. 개빈 해밀턴 작
서홍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중에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받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자신의 사랑이자 명예를 상징하는 여인 브리세이스를 빼앗긴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제우스 신에게 청하여 자신이 참전하지 않는 동안 그리스 진영이 트로이에게 계속 패퇴하게 한다. 이 참혹한 결과를 보고 아가멤논은 그가 앗아간 것을 몇 곱절로 배상하면서 아킬레우스에게 화해를 요청하지만 분노가 뼈속까지 스며든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을 향한 증오를 감추지 않고 모든 것을 거절한다.

‘일리아스’에서는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 아킬레우스가 느낀 분노를 신들의 분노를 의미하는 메니스(menis)로 표현했고,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의 화해를 거부했을 때의 분노를 비정상적인 마음의 상태인 콜로스(cholos)로 표현했다. 더 이상 그의 분노가 정당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용사들의 계속되는 고통을 지켜보던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Patroclos)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대신 전쟁터로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로 오인 받을 정도로 그 못지 않은 용맹을 보이며 트로이 진영을 혼란에 빠뜨리다가 아폴론의 도움을 받은 트로이 장수 헥토르(Hector)의 창에 목숨을 잃는다. 이 소식을 들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이제 헥토르에게 향하고 그는 전쟁터로 복귀하기로 결정한다.

남들과는 다르게 아킬레우스는 두 개의 운명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전쟁터로 나가면 목숨을 잃는 대신 불멸의 영광을 얻게 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면 오래 살게 되는 대신 그의 이름은 잊혀지게 된다. 복수를 위해 다시 나서는 아킬레우스는 두 운명 중에서 죽음을, 그리고 죽음으로써 얻게 되는 불멸의 영광을 선택하게 되는 셈이다.

셀 수 없는 트로이 용사들을 죽인 후 헥토르까지 죽이면서 아킬레우스는 복수를 이룬 아킬레우스의 꿈에 파트로클로스가 나타난다. 장례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아서 자신의 영혼이 지하세계인 하데스(Hades) 밖에서 방황하고 있다면서 죽은 자에 대한 올바른 예가 행해지기를 호소하기 위해서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그를 기리기 위한 경기(올림픽 경기의 전신이 되는 셈이다)를 주최한다.

하지만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사그라들 줄 모른다. 파트로클로스의 성대한 장례식과는 대조적으로, 헥토르의 장례는 허용되지 않고 전쟁터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개들의 먹이가 될 위험에 처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차 뒤에 헥토르의 시신을 묶어서 파트로클로스의 주검 주위를 끌고 다니는 만행까지 저지른다.

이에 신들은 분노하고 헥토르의 시신을 온전히 보존해 주면서 시신이 아버지의 품으로 되돌아갈 것을 결정한다. 헤르메스(Hermes) 신의 도움으로 헥토르의 아버지인 프리아모스(Priamos)는 아킬레우스의 진영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고 마침 식사를 마친 아킬레우스를 보게 된다. 이 장면을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으로 감상해보자.



위대한 프리아모스는 그들 몰래 안으로 들어가서는 가까이

다가가 두 손으로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잡고 자기 아들들을

수없이 죽인, 남자를 죽이는 그의 무시무시한 두 손에 입을 맞추었다.



모두가 깜짝 놀란 가운데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시오!

나와 동년배이며 슬픈 노령의 문턱에 접어든 그대 아버지를.

[생략]

아킬레우스여! 신을 두려워하고 그대 아버지를

생각해 나를 동정하시오. 나는 그분보다 동정받아 마땅하오.

나는 세상 어떤 사람도 차마 못할 짓을 하고 있지 않소!

내 자식들을 죽인 사람의 얼굴에 손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오.”



아들의 주검을 되돌려 받기 위해 아들을 죽인 자의 손에 입맞춤을 하며 호소하고 있는 프리아모스를 보면서 아킬레우스는 “아버지를 위해 통곡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고, 이내 결코 화합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서로 끌어 안으면서 서럽게 통곡한다.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발 앞에 쓰러져 남자를 죽이는 헥토르를 위해 흐느껴

울었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때로는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울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울음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 찼다.* (‘일리아스’ 호메로스 지음·천병희 옮김·도서출판 숲·2007)



아킬레우스는 운명에 의해 정해진 바, 다시 전쟁터로 나선 자신이 살아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아버지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그를 보호할 훌륭한 아들이 하나도 남지 않은 프리아모스와 머나먼 고향 땅에서 아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아킬레우스의 아버지 펠레우스(Peleus)는 이 장면에서 겹쳐 보이게끔 의도되었다.



‘일리아스’는 트로이의 멸망을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이다. 그 분노가 신적인, 정당한 분노로 싹이 트고 중간에 정당화할 수 없는 분노로 변질되었다가, 프리아모스의 모습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투영되는 것을 본 아킬레우스가 눈물로 분노를 녹여내는 순간에 이 주제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만약 트로이의 목마나 트로이의 멸망까지 포함했더라면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결말이 나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