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우크라 피란 고려인청소년과 회복력 있는 연극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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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
[전남일보]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우크라 피란 고려인청소년과 회복력 있는 연극 치료
(17) 광주비엔날레와 삶의 극장 <고려인 청소년>
고려인들 이주의 삶을 연극화 통해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한 점 뛰어나
다중적 취약성 가진 고려인 청소년
작품에 정확한 메시지는 못 담아내
고려극장·고려인 정체성 파악 흐릿
연극이 고려인 청소년 일상적인 삶
어떤 의미로 다가서는지 생각해야
  • 입력 : 2023. 08.03(목) 14:21
영상 작품 ‘삶의 극장’의 한 장면. 사진 필자 제공
2023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일본인 작가 고이즈미 메이로가 ‘삶의 극장’이라는 영상작품을 전시했다. 여기서 삶의 극장은 의미상으로 볼 때 오히려 ‘삶의 연극’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인 작가가 독립국가연합(CIS)의 고려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있는 고려극장에 관심을 갖고, 광주에 있는 고려인 청소년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들면서 역사적인 조국으로 들어온 이들이 이주와 정착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정체성 문제에 대한 작업을 했다는 점이다.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 작업 과정은 간단했다. 그는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에서 있었던 몇 장의 공연 사진 장면을 통해 광주광역시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 청소년들에게 무대 연기를 가르치고, 똑같은 의상을 입고 사진속의 인물을 상상하며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과거 고려극장의 예술적 삶을 오늘날 고려인 청소년들이 새로운 예술적인 연극으로 돌려놓는 작업을 하게 하였다. 그동안 고려극장은 삶을 예술작품으로 연출하는 것으로 생예술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고려극장은 삶과 예술의 긴밀한 얽힘이 있었던 곳이다. 작가는 이 작업이 “고려인 청소년들이 역사적 부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역할 연기의 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변혁하는 기술을 익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러시아의 극작 이론가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1879∼1953)의 연극 이론을 적용했다. 예브레이노프는 일찍이 포스트드라마 시대의 핵심 키워드인 연극성(Theatricality)과 수행성(Performativity), 삶의 연극화, 변화의 본능 개념을 비롯해, 장소 특정적 공연과 연극치료 등 동시대 연극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중요한 단서들을 선구적으로 제시했다. 한국 연극학계에서도 예브레이노프의 연극론은 매우 이해하기 힘들고 복잡하지만 최근에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동시대 연출가에 속하는 러시아의 메이에르홀드, 타이로프, 바흐탄고프 등에 비견할만 하다. 그러면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의 연극론의 핵심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을 살펴본다.

첫째는 고이즈미 메이로의 고려극장 공연 사진 연극 재현은 매우 실험적이고 포퍼먼스적이다. 이는 예브레이노프가 행위자와 관객의 구분을 없애고 관객 참여적인 대규모 퍼포먼스를 실행한 그의 연출 작업보다 더 실험적이다. 작가는 연극 공연 사진을 통해 연극과 일상의 경계, 예술가와 관객의 경계를 넘어 일상 속의 예술, 삶의 연극화를 추구하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시도들은 연극이 극장이 아닌 워크숍 공간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여 일반인들이 예술가가 되어 참여하는 수행적인 퍼포먼스의 성격을 띠게 만들었다. 따라서 고이즈미 메이로가 보인 연출 작업들은 예브레이노프가 했던 당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연극을 실험했던 그때보다 더 실험적이라 할 수 있는데 작업 과정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연기 선생이 15명의 아이들에게 걷기와 뛰기 등 아주 기본적인 동작부터 고려극장의 사진을 보고 상황을 연상해보는 과정까지 단계적으로 매우 세심하게 가르쳤다고 말했다. 전시 작품은 청소년들이 토론하고 연기하는 모습을 카메라 3대로 찍은 영상을 프로젝터 5대로 전시장 벽면에 겹쳐 비춰준다. 프로젝터마다 편집된 영상의 길이가 달라서 벽면에는 언제나 새로운 화면이 구성된다. 영상에서 청소년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영상들이 중첩되는 양상은 마치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개인의 정체성이 얽히는 과정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아주 단순한 고려인 청소년들의 이틀간의 연기 워크숍을 통한 공연 사진 재현 영상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작가는 아주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는 고려극장의 공연 사진들을 보여주고 연기 강사의 지도를 받아서 추상적 줄거리를 가진 연극을 만들어내는 시도에 불과하다.

문제는 고려인 청소년들이 고려극장이나 고려인 이주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가 고려인 청소년과 인터뷰를 하였는데 거의 대부분이 우즈베키스탄 출신이었다. 고려극장은 현재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기에 당연히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에서 온 이들은 고려극장에 가봤거나 고려인 공연을 본 적이 있는지 물으면 잘 모를 수밖에 없다.

물론 나이가 있는 고려인은 고려 극장이 카자흐스탄(1937-1950년 우즈베키스탄에도 고려극장 존재)에 있었지만 구소련 여러 곳을 공연을 했다고 알고는 있었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고려극단이 어릴 때 공연을 위해 우즈베키스탄의 학교를 방문했지만, 무슨 공연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려인들이 모여 살았던 집단농장과 같은 곳은 고려극단이 자주 방문했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방문하지 않기에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또한 인터뷰에서 청소년들은 고려인의 역사에 대해서도 거의 대부분은 배우지 않았고 부모나 조부모에서 직접 듣지 않았기에 모른다고 했다. 고려인 역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설문지 답변도 살펴보니 고려인 역사에 대한 정확한 팩트를 알고 있지 못했다. 왜곡이나 잘못된 내용이 많았다. 특히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어디에서 중앙아시아 등으로 갔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고 답했다. 그래도 1937년 중앙아시아 고려인 강제 이주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는 고려극장 공연 사진을 통해 역사적 서사를 불어넣고 연극 재현 영상을 혼합해서 작품화를 만들었다. 고려인들의 과거(공연 사진)와 현재 세대들의 영상이 혼재하게 만들었다. 작업에서는 이들이 고려극장과 자신들의 역사를 모르기에 훨씬 힘이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사건도 단지 다양한 연극 사진 재현이다. 과연 이러한 작업이 고려극장을 알지 못하고 고려인 이주사를 알지 못한 CIS 국가 고려인 청소년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줄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둘째는 고이즈미 메이로가 고려극장 공연 사진 연극 재현을 매우 연극성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는 연극을 ‘현실의 재창조’ 혹은 ‘내재적 욕망의 변형’으로 규정하였다. 예브레이노프는 일상생활 속에서 타인에게 인상적으로 보이기 위해 의복을 갖추어 입거나 목소리 톤을 바꾸는 등의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이미 모든 인간이 배우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성격은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변형시키고자하는 본능으로부터 발현되는 것이라 했다. 그는 이러한 연극성은 무대가 아닌 삶의 공간에서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연기는 이미지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창조였고, 연극은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세계의 창조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이즈미 메이로는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이 언급한 인간에게는 ‘연극적 충동’, 즉 일상의 의례와 놀이를 통해 자신의 환경과 정체성을 변형하고 싶은 충동이 있다는 것을 수용한다.

그러면 작가가 인터뷰한 고려인 청소년들이 공연 사진 재현 무대를 통해서 자신들의 일상에서의 변형, 주체의 자발적인 변형의지가 형성되는지 이다. 또한 과연 에브레이노프가 주장한 “삶이 곧 극장이며, 삶이 곧 연극이다”라는 조건이 가능한지 이다. 연극성이 삶의 연극화, 변화의 본능을 자극할 수 있는가!

작가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고려인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직업적인 꿈은 가지고 있었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의 현실은 꿈꾸고 있는 것과는 다른 상황임을 인지한다. 이들은 한국에서 언어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한국 적응부터가 문제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온 이들은 한국 입국 전까지 한국어를 전혀 몰랐기에 한국어 수준은 제로 상태이다. 한국어를 배우고는 있지만 어렵다. 학교에 한국어 프로그램이 있지만, 자리가 없어 참가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앞으로 한국어 습득에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따라서 작가가 연출한 연극을 통해 현실의 재창조 혹은 내재적 욕망의 변형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고려인이지만 역사적인 조국에서 겪는 문화적 혼종성이나 정체성 협상, 또는 정체성 혼란에서 무엇인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즉,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상연한 공연 사진을 통한 고려인 청소년 연극 역할극 재현의 과정이 고려인의 정체성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련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창조나 변형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운명적인 삶을 연출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이 삶을 연극화하는 것일 것이다. 삶을 자신의 삶이 되게 연출할 때 삶은 완전한 의미를 획득하며 그들의 삶이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작가는 한국에서의 낯설고 어려운 적응의 삶을 연극화를 통해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 정착 문제 속에서 현실적인 다중적인 취약성을 가진 고려인 청소년들에게 작품의 정확한 메시지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나 작가가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마을에 있는 고려극장은 20세기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 공간이다”라고 지적했지만, 오늘날 출생지역이 서로 다른 청소년 고려인들에게 개인 정체성이나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연결성을 고려극장이 갖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아쉬운 점이 남는다. 그것은 고려인 이주사를 잘 모르는 작가가 예브레이노프의 연극론을 기술적으로 연결하는 것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사실 고이즈미 메이로가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의 연극 치료의 개념에 더 초점을 맞추었으면 좋을 뻔 했다. 그것은 고려인 청소년이 한국 적응과정에서 트라우마를 겪으며 극복해 가면서 회복력을 보이는 그런 현실의 재창조나 삶에 대한 변형의지와 같은 것이다. 예브레이노프는 연극이 현실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사실 우크라이나에서 온 고려인 청소년들은 전쟁 트라우마을 겪고 있기도 한다. 우크라이나 피란 청소년들은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피란, 이별과 상실, 재정착 등의 경험을 통해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다. 더군다나 예정하지도 않았던 한국에 갑자기 오게 되어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그리고 한국 문화 차이와 한국어를 모르고 소통이 안 되니 이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연출적인 삶, 즉 연극이 일상적인 삶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를 다시 묻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자신을 연출하는 행위가 자기 인생을 능동적으로 기획하는 태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가 자기 연출을 통하여 근본적인 삶의 개혁을 이루어낼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던 점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