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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서석대>친일행보
이용환 논설실장
  • 입력 : 2023. 08.29(화) 17:37
이용환 논설실장
홍범도는 대표적인 평민 의병장이었다. 머슴, 광산노동자, 포수로 떠돌던 그는 1907년 일제가 무장봉기를 막으려고 총기를 압수하자 포수를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홍범도 부대는 함경도 삼수·갑산에서 일본군을 잇달아 물리쳤다. ‘홍대장 가는 길에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엔 비가 내린다’ 함경도 사람들은 ‘날으는 홍범도가(歌)’까지 지어 불렀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뒀다. 영남대 이동순 교수는 이런 홍범도를 두고 “의병전투에 아내와 두 아들 모두 바치고도/어금니로 눈물 깨물던 사람/부족한 군자금 구하러 차디찬 러시아 땅을/두 번씩이나 걸어서 그것도 한겨울에 다녀온 사람….”이라고 썼다.

백야 김좌진도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항일혁명가였다.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 뒤 만주 길림으로 망명해 항일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특히 그는1920년 북로군정서 사단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해 일본군을 대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진정 내가 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 것이다.” 1911년 길림으로 망명하면서 그가 쓴 시다.

홍범도와 김좌진의 활약에는 만주에 세워졌던 신흥무관학교의 힘이 컸다. 1911년 이회영·시영 형제를 비롯한 애국 열사들이 만든 신흥무관학교에는 지청천, 이범석 등 수많은 애국 청년이 국경을 넘어 달려와 합류했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내 달리며 일본군과 싸웠다. 1920년 폐교되기까지 이곳을 거쳐간 3000여 명의 독립군도 상해임시정부와 대한광복군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그곳에 뿌려진 이들의 선혈이야말로 대한민국 역사의 시작이면서 희망이었다.

국방부가 육사에 설치된 홍범도와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을 비롯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철거할 움직임이다. 이 흉상들은 2018년 3월 1일, 장병들이 사격훈련을 한 후 남겨진 5만 발의 탄피를 모아 제작한 것이다. 총도 실탄도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조국독립의 불씨를 살려낸 독립투사,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이면서 독립전쟁의 영웅들을 지우는 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철지난 이념전쟁과 항일의 역사 지우기. 윤석열 정권의 이해할 수 없는 친일행보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를 이렇게 뒤흔들고 있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