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영웅·애국자→ 반역자’로 죽음 맞은 프리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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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
[전남일보]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영웅·애국자→ 반역자’로 죽음 맞은 프리고진
(19)프리고진의 무장반란과 역사적 교훈
1917년 러시아 내전 최대 1300만명 숨져
소련 시기엔 쿠데타로 제국 붕괴 ‘분열’

프리고진 무장반란 협상 하루만에 중단
푸틴, 유혈사태 없이 뛰어난 위기 관리
불안정한 통치 시스템 드러나 큰 타격도
  • 입력 : 2023. 08.31(목) 13:02
24일(현지시각) 러시아 트베르 지역 쿠젠키노 마을 인근에서 러시아 군인들이 추락한 바그네르 그룹 전용기 잔해 주변에 모여 있다. 바그네르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23일 전용기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중 비행기가 추락해 탑승객 전원과 함께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뉴시스
러시아 용병 바그너 그룹 수장 프리고진이 항공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의 상황에서 러시아에서 무장반란이 일어난 지 꼭 2개월 만이었다. 6월 23일 저녁 프리고진은 러시아 국방부 부대가 용병 캠프에 미사일 공격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러시아 연방의 군사 지도부와의 실제 무력 충돌이 있었다. 6월 24일 프리고진은 로스토프 나돈누 남부 군관구의 본부 및 여러 행정 건물을 바그너 그룹의 통제 하에 두었고, 그의 군대는 보로네시 지역에서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는 이를 ‘정의의 행진’이라고 칭했다. 바그너의 행진에 각지에 위치한 프리고진의 모든 군인들의 총 수는 25,000명으로 알려졌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대국민 TV연설에서 프리고진의 행동을 “이것은 무장 반란이며 조국에 대한 반역이다. 바그너 반란은 국가와 국민의 배후를 찌르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벌어지는 시기에 나라를 쪼개는 일과 같기에, 배신에 대한 정당화는 없으며 정당화될 수도 없다”고 말했다. 프리고진은 영웅이자 애국자에서 하루아침에 반역자가 되었다.

또한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을 벌이던 1917년에도 러시아에 그러한 (등에 칼을 꽂는) 공격이 가해졌으며 이 때문에 승리를 도둑맞았다. 군대와 국민의 등 뒤에서 이루어진 음모, 밀모, 이전투구가 군대의 엄청난 동요와 와해, 국가 붕괴, 광대한 영토의 상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전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20세기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다. 이들 사건은 국가를 죽음의 위기에 빠뜨리고 국가를 멸망시킨 것은 국민의 이념적, 정치적 혼란이었다. 그것은 러시아 제국과 소련 시기에 일어났다. 하나는 러시아 혁명시기 내전으로 러시아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소련 시기 쿠데타 반란으로 제국의 붕괴와 분열을 가져왔다.

첫째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시기 러시아 내전이다. 러시아 내전은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시작되어 볼셰비키가 집권한 러시아 제국 영토에서 1922년까지 다양한 정치, 민족, 사회 집단 및 국가 조직 간의 일련의 무력 충돌을 말한다. 주요 투쟁은 1918년 볼셰비키에 의해 창설된 노동자와 농민의 적군과 새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의 백군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1917년에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고 러시아는 혁명이 일어나 제국이 무너졌다. 그해 9월 러시아 제국 총사령관 라브르 코르닐로프는 러시아 수도이자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군대를 진격시켜 온건 사회주의파 주도의 임시 정부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쿠데타 시도는 러시아 내 온건파를 약화해 결과적으로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의 정권 장악을 앞당겼다. 이후 1922년까지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 적군과 반혁명파인 백군 사이에 끔찍하고 잔인한 내전이 이어졌다.

러시아 내전은 적군의 승리로 끝났다. 다행이도 러시아 제국 붕괴 이후 무너진 국가의 영토 보전이 회복되었다. 러시아를 기반으로 한 소련이 수립되었고, 소련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소비에트 권력의 승리 행진’이라고 불렸다. 폴란드, 핀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루마니아에 합병된 베사라비아, 서부 우크라이나, 서부 벨로루시는 러시아로부터 독립했다.

내전은 막대한 물질적, 인적 손실을 가져왔다. 국가 경제에 가해진 피해는 약 500억 금 루블에 달했고 산업 생산은 1913년 수준의 4~20%로 떨어졌으며 농업 생산은 거의 절반으로 감소되었다. 국가의 금융 시스템은 완전히 무질서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내전 동안 러시아 영토에서 2,000종 이상의 지폐가 유통되었다.

내전은 1921~1922년의 기근으로 3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대규모 영양실조 및 관련 전염병으로 인해 높은 사망률이 발생했다. 내전에서 러시아의 총 인명 손실은 약 800만에서 1,300만 명에 달했다. 내전의 영향으로 최대 2백만 명이 러시아를 떠나 이주했다. 이주의 주요 중심지는 파리, 베를린, 프라하 및 기타 유럽 중심지와 중국 하얼빈이었다. 러시아 이주자 중 일부는 북미와 라틴 아메리카로 떠났다. 많은 지식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내전은 전통적인 경제적, 사회적 유대를 파괴하고 국가의 외교 정책적 고립을 악화시켰다. 내전의 영향으로 소비에트 정치 체제의 특징이 형성되었다. 국가 행정의 중앙 집중화와 내부 반대에 대한 폭력적인 억압이 이루어졌다.

둘째는 소련 시기 쿠데타 반란으로 제국의 붕괴와 분열이다. 1991년 12월 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으로서의 활동 종료를 발표했다. 이날 모스크바 크렘린의 깃대에서 소련의 국기가 내려지고 러시아 연방의 국기가 게양되었다. 소련이 더 이상 국가 및 국제법의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1922년에 결성된 소련은 ‘미래 세계 혁명’의 기반으로 볼셰비키당 지도부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1991년 8월 19일 소련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 동의하지 않은 소련 최고 지도부의 대표자들은 국가 비상 사태위원회를 창설했다. 여기에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소련 국가 지도자들이 포함되었다.

쿠데타의 주요 목표는 소련을 연합으로 바꾸는 새로운 연합 조약의 서명을 막는 것이었다. 언론을 통해 소련 헌법 127조 7항에 따라 고르바초프의 소련 대통령 직무 수행이 건강상의 이유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성명이 전달되었다. 소련의 부통령 게나디 야나예프에게 대통령 권한 대행 업무가 이전되었다. 크림반도에서 휴가 중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포로스에 있는 정부 별장에 격리되었다.

군대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투입되었다. 약 4,000명의 군인, 362대의 탱크, 427대의 장갑차 및 보병 전투 차량이 모스크바로 이동했다. 공수 부대가 레닌그라드, 탈린, 트빌리시, 리가 부근에 배치되었다. 국가 비상 사태위원회는 진압 경찰이 관리 건물과 텔레비전 방송국을 빠르게 점령한 발트해 연안 국가의 반항적인 공화국에서만 상황을 통제했다. 모스크바에서 군대는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의 지도부가 있던 벨리 돔(일명 백악관)을 점령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구금하지도 않았다.

대응은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와 집회였다. 쿠데타에 대한 저항은 러시아 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이끌었다. 이미 8월 19일 옐친은 그의 법령에서 국가 비상위원회의 행동을 불법이라고 불렀고 지역 당국에 러시아 정부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촉구했다. 야당 정치인, 문화 인물 및 일반 모스크바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공화국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백악관 근처에 모이기 시작했다. 수도의 많은 주민들은 군인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설득하기 위해 시내로 갔다. 그러나 8월 21일 밤에 충돌이 발생했다. 그 결과 3명이 사망했으나, 나중에 그들은 영웅으로 불려졌다.

3일 후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8월 21일 아침 모스크바에서 군대의 철수가 시작되었고, 8월 22일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그의 가족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쿠데타에 가담한 자들은 형법(반역죄) 64조에 따라 기소되었다.

그 후 1991년 9월 6일 국무원은 소련의 기존 헌법과 연합 공화국의 연방 탈퇴에 관한 법률에 반하여 발트해 연안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1991년 11월 14일 국무원은 1991년 12월 1일부터 소련의 모든 부처 및 기타 중앙 정부 기관의 청산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2월 9일 새로운 연합 조약에 서명하기로 합의했다. 아제르바이잔과 우크라이나는 가입을 거부했다. 1991년 12월 8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대통령들은 벨라루스 벨로베쥐스카야에서 독립국가연합(CIS) 설립에 관한 협정에 서명을 하였다. 1991년 12월 21일 알마아타(카자흐스탄)에서 구소련 공화국의 11개 지도자가 CIS의 목표와 원칙, 그 기초에 관한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 선언은 벨로베쥐스코예 협정(일명 소련해체협정)을 확인하여 CIS의 형성으로 소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 8월 쿠데타는 광활한 국가의 역사 과정을 바꾸었다. 많은 역사가들에 따르면 공산 정권의 몰락과 소련의 붕괴를 재촉한 주된 원인은 소련 엘리트들이 조직한 쿠데타였다라고 하였다.

한편, 이 두 번의 사건을 통해 프리고진의 무장반란의 중단이 갖는 역사적 교훈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가정은 별 의미가 없지만 그가 모스크바 진격을 계속했고 러시아 연방군과 전투가 있었다면 러시아 혁명시기 내전과 소련붕괴와 같이 엄청난 국민과 국가의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은 프리고진이 후퇴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문을 열어두고 바그너 그룹과 러시아군 사이의 대결을 피했다. 그는 벨라루스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에게 중재자 역할을 요청했다. 바그너 군대는 우크라이나의 야전 캠프로 복귀했다. 프리고진과 바그너 군대는 벨라루스로 떠났다. 그 후 프리고진의 거치에 대해서는 러시아와 벨라루스에서 수많은 서사가 만들어졌었다.

결국, 푸틴은 어떤 방식으로든 유혈 사태 없이 이 엄청난 위기를 관리할 수 있었다. 그는 최소한의 손실로 위기에 대처하고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물론 무장반란이 하루 만에 일단락 됐지만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십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받은 것도 분명해 보였다. 반란 시도는 국가의 통치 시스템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실제 이 무장반란은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그의 권위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이었다. 프리고진의 6월 반란으로 끝난 타협은 가장 끔찍하고 가장 괴물스럽고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나리오에서 국가를 구했다. 푸틴 대통령 자신도 한 나라의 통합을 분열시키는 행위, 국가를 무정부 상태와 형제 살해, 결국 패배와 항복으로 가는 비극과 분열의 길에서 러시아를 구원했다고 했다.

프리고진의 죽음은 반란 후 2개월 만에 발생했지만 지연된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이미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중앙정부국(CIA) 국장 윌리엄 번스는 “푸틴은 일반적으로 복수는 차갑게 먹는 것이 가장 좋은 요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는 반역과 배신에 대해서는 절대 용서할 수 할 수 없고 반드시 그에 상응하게 확실한 복수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뜻한 말이다. 어쩌면 무장반란 시도에 처벌을 면한 듯 했지만 국가에 대한 배신으로 프리고진의 운명은 죽음으로 끝났다.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