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수많은 ‘김산’들과 ‘홍범도’들의 못다한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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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수많은 ‘김산’들과 ‘홍범도’들의 못다한 귀향
362)김산의 아리랑
위정자들에게 경고한다. 넋일랑은 넋반에 받고 혼일랑은 혼반에 받아 비로소 회향할 수 있었던 이들을 누구 맘대로 다시 쫓아내려는가.
  • 입력 : 2023. 09.07(목) 14:35
김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비애와 수심에 가득 찬 아리랑 한 대목, 님웨일즈가 김산의 구술을 받아 쓴 책 『아리랑』에서 몇 구절 가져왔다. 만주로 중앙아시아로 뿔뿔이 흩어져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마지막 넘었던 고개다. 일본으로 미국으로 산산이 흩어져 넘어야 했던 또 다른 문경 고개다. 떡 바구니를 인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팔다리를 떼어주고 목숨까지 바치며 넘어야 했던 스무고개다. 아리랑 노래의 풍경은 이토록 통절하게 묘사되기 일쑤다. 물론 정선아라리 등 강원도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오리지널한 아라리는 성애적이고 통속적인 저자거리의 노랫말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훗날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등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주지하듯이 두 번의 큰 기점, 경복궁 중수기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거치며 재구성된다.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 심지어는 민족의 유전자로 부상한 데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라는 압제의 역사가 배경으로 자리한다. 대개의 연구자가 합의했던 지점은 아리랑이 근대민요라는 점이다. 하지만 오선보로 기록되었던 최초의 아리랑, 우리가 본조 아리랑으로 호명했던 아리랑은 강원도 자진아라리의 편곡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민요로 분류하는 아리랑의 기저가 강원도 아라리에 있다는 뜻이다. 김지하는 이를 ‘아우라지 미학의 길’이라 선언한 바 있다. 우리 민족의 DNA로 평가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를 헐버트(1863~1949)의 아리랑에서 나운규(1902~1937)의 영화와 김산(1905~1938)으로 이어지는 대하 아리랑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아리랑 자체를 풀어 말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지면이 필요할 것이기에 오늘은 단지 김산의 아리랑에 기대어 논의한다. 우리는 다시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김산은 실제 고국산천을 떠나 지금의 중국 땅에서 오로지 광복을 위해 투신하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김산을 포함한 수많은 ‘김산’들, 정녕 그들은 회향하지 못했는가?



헐버트의 아리랑에서 김산의 아리랑까지



지난 칼럼에서 K-팝의 노둣돌을 말하며, 헐버트의 아리랑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난영을 중심으로 한 일제강점기의 ‘저고리시스터’와 미군정기 무대 기반으로 성장하였던 ‘김시스터즈’의 활약 이전에 헐버트를 통해 해외로 알려진 아리랑이 더 원조 격일 수 있다는 취지였다. 헐버트가 아리랑을 오선보에 채보하여 자신의 동생에게 보낸 것이 1886년이다. 1896년에는 ‘조선의 성악(Korean Vocal Music)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다. “아리랑은 조선인들에게 쌀과 같은 존재이다.” 노래가 쌀이라니, 대단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기를 “조선인들은 즉흥곡의 명수다. 조선인들이 노래하면 워즈워드 같은 시인이 된다.”라고 하였다. 어디 워즈워드 뿐이겠는가. 근자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밥딜런처럼, 재즈 형식의 즉흥곡을 분출하는 수많은 한국인의 음악적 저력과 역량을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는 1894년 동학 혁명기를 지난 시점이었다. 아리랑이란 노래에 울분과 체념, 항거와 투쟁의 의미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던 시기다. 이 풍경은 1900년 이후 만주로 시베리아로, 하와이로 뿔뿔이 흩어지며 이산의 아픔을 노래하는 시기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헐버트의 아리랑에서 김산의 아리랑으로 이어졌다고나 할까. 김산(본명 장지락)이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이름이 적잖이 알려진 것은 님 웨일즈 때문이다. 님 웨일즈가 김산의 구술을 받고 더불어 정리한 책이 『아리랑』이다. 1941년 미국에서 『Song of Arian』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1953년 일본에서, 홍콩과 중국 등지에서 출판되었다. 1984년 우리나라에서 출판되었다가 1993년에 님웨일즈와 김산의 공저로 재출판되었다. 고명철이 「김산, 동아시아의 혁명적 실천, 그리고 ‘문제지향적 증언서사’」라는 글에서 『아리랑』을 인용한 대목을 옮겨둔다. 김산의 고백이 절절하다. “이 노래는 죽음의 노래이지, 삶의 노래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가운에서 승리가 태어날 수도 있다. 이 오래된 ‘아리랑’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구절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더욱 많은 사람이 ‘압록강을 건너’ 유랑하고 있다. 그렇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는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어디 김산만 그러했겠는가. 수많은 ‘김산’들에게 고국은 독립되어야 할 공간이었고 돌아와야 할 공간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대에 걸쳐 살아온 수구초심의 고향이었다. 아리랑은 고향을 잃고 이방의 땅을 떠돌아다니며 불렀던 디아스포라의 노래이기도 했다. 한인 디아스포라로 호명하는 이른바 까레이스키, 자이니치, 조선족 나아가 전 세계 도처의 한인들의 아리랑 말이다. 그런데 광복 이후 나라는 둘로 쪼개졌다. 고향이 갈라졌다. 남과 북이 극단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였다. 각각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은 이들은 배척해버렸다. 남과 북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영령들이 많다. 아리랑은 남한이 먼저 유네스코에 등재하였고 북한이 집체 아리랑으로 뒤를 이었다. 통합 아리랑으로 등재하지 못한 게 못마땅했지만 아쉬운 대로 타국을 방황하던 영령들에게 회향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던 셈이다.



남도인문학팁

김산이 남겨둔 아리랑 마지막 한 구절

김산은 아리랑이 죽음의 노래이지만 삶의 노래라 했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 승리가 태어난다 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구절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마지막 한 구절이 무엇일까. 지난 2005년 광복절에는 214명의 독립운동가를 훈포장하며 김산 등 47명의 사회주의 계열을 포함시켰다. 이전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비하면 놀라울 만한 사건이었다. 수많은 ‘김산’들이 서로 어깨 겯고 귀환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가 합의하고 수용한 역사가 싸목싸목 진행된 결과였다. 나는 이것이 자연적인 역사요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는 자연스러운 전진,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발걸음 말이다. 적어도 김산과 ‘김산’들의 귀환과 회향(回鄕)이 가지는 의미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디 홍범도라고 다르며 정율성이라고 다를 것인가. 그만큼 우리의 국력이 강해졌고 경제적으로 부강해졌으며 북한에 비해 사상이나 이념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비교우위의 자신감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다. 김구의 언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결 고운 문화적 권위도 갖게 되었고, K팝이 전세계 무대를 가로질러 나라의 격조를 높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방 일어나는 역사적 퇴행, 심지어 헌법과 민주주의 질서를 전복해버리는 황당무계한 반동들을 보며 생각이 깊어진다. 루쉰은 「고향」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고향은 지상의 길과 같아서 본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며, 다만 그것의 실현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만 생겨나는 실천적이고 불확정적이며 미래적인 것이다.” 수많은 ‘김산’들과 ‘홍범도’들에게 최소한의 귀향처를 마련해드린 것이 결국 우리의 실천적 행로 속에서 마련된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정자들에게 경고한다. 넋일랑은 넋반에 받고 혼일랑은 혼반에 받아 비로소 회향할 수 있었던 이들을 누구 맘대로 다시 쫓아내려는가. 우리에게는 김산이 남겨두었던 아리랑의 마지막 한 구절을 완성할 역사적 책무가 있다. 어렵게 놓아온 노둣돌을 치워버리는 행태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 역사적 퇴행과 반동의 작태를 당장 중지하라.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