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조광조 못다 이룬 꿈 잠들고, 이한열 새꿈 피어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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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조광조 못다 이룬 꿈 잠들고, 이한열 새꿈 피어난 곳
●화순 남정마을
기묘사화때 유배 조광조 사약
민주열사 이한열 뛰어놀던 곳
죽수서원·능주향교·양복사…
文·史·哲… 인문학 조건 갖춰
  • 입력 : 2023. 09.14(목) 14:23
  •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남정마을 풍경. 큰 나무와 돌담이 마을의 품격을 높여준다.
능주향교 전경. 암수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이한열 열사의 태 자리. 조광조 적려유허에서 가까운 데에 자리하고 있다.
해질 무렵 마을 풍경. 어르신이 마을길을 오가며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운주사, 적벽, 고인돌유적, 세량지, 백아산, 너릿재…. 화순엔 가볼만한 데가 많다. 발품을 팔아 찾아봐야 할 역사문화 유산도 지천이다. 정암 조광조와 민주열사 이한열을 만날 수 있는 마을도 있다.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다.

조광조(1482∼1519)는 개혁을 부르짖은 사상가였고, 정치가였다. 그는 유교를 근본으로 한 왕도정치를 주창했다. 도교를 추앙하던 훈구파를 공격한 이유다. 중종반정으로 공신 반열에 오른 103명 가운데 78명의 공적을 삭제했다. 도교 주관 제사인 소격서도 없앴다.

학덕과 소양을 판단하는 현량과를 도입, 새로운 인재를 채용했다. 토지를 백성에 나눠주는 균전제를 시행하는 등 민생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득권을 쥔 세력의 저항이 거셌다. 조광조가 역심을 품고 왕이 되려 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이 꾸며졌다. 중종이 묵인하고 동조했다. 훈구파의 쿠데타였다. 기묘사화다.

조광조가 능주(능성현)로 유배됐다. 유배 25일 만에 사약을 받았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조광조가 남긴 절명시다.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조광조가 유배된 곳(적려유허)이 능주면 남정리다. 여기에 조광조를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1667년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웠다.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전서는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증이 썼다. 영정각과 초가도 복원돼 있다.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지낸 사람이 화순사람 양팽손이다. 그는 조광조를 추모하는 사당도 지었다. 쌍봉사 건너편의 서원터와 한천면에 있는 죽수서원이 그곳이다. ‘죽수’는 능주의 다른 이름이다.

조광조와 양팽손 사이가 지란지교에 비유된다. 지초와 난초같이 향기로운 사귐을 일컫는다. 양팽손은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도 조광조와의 절의를 끝까지 지켰다. 50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다.

피는 속일 수 없다고 했던가? 땅의 기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조광조 적려유허에서 가까운 데가 이한열의 태 자리다. 1966년 8월 태어난 이한열은 조광조와 만난 적 없다. 다만 조광조가 유배된 땅에서 뛰놀며 시나브로 조금씩 들었을 것이다.

이한열은 어려서 능주를 떠났다. 광주에서 동산초등학교, 동성중학교를 다녔다. 중학 시절에 광주민중항쟁을 직접 봤다. 진흥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에 들어간 이한열은 비민주적인 정치?경제와 열악한 사회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각종 집회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불길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87년 6월 민주항쟁이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를 앞두고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6월 9일 열렸다. 대회에 참가한 이한열은 학교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은 전국민을 분노케 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는 비폭력으로 치러지고, 최루탄 추방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갔다.

‘피로 얼룩진 땅, 차라리 내가 제물이 되어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싶다.’ 이한열이 학창시절 노트에 적은 글이다. 사경을 헤매던 그는 7월 5일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의 나이 20살이었다.

장례식은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이한열 열사는 광주민족민주열사묘역(망월묘역)에 잠들어 있다. 아들을 보내고 속앓이를 해오던 아버지도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다 지난해 1월 남편의 옆자리로 옮겨갔다.

화순 남정리(南亭里)는 37살 조광조의 못다 이룬 꿈이 잠들고, 20살 이한열의 새꿈이 피어난 곳이다. 정자, 교촌, 남거, 봉룡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다. 큰 정자나무가 있다고 정자(정잿몰), 남평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남거, 향교가 있다고 교촌, 비봉산과 용암산에서 한 글자씩 따와 봉룡이다. 일제강점 때 종연방적이 뽕나무를 심으면서 모여든 사람들이 산 종방도 있다. 남정리는 남거와 정자의 앞 글자를 따 붙인 지명이다.

남정리는 능주면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비봉산(255m)이 도곡면 대곡리와 경계를 짓고 있다. 주민은 300여 명 산다. 주로 벼농사를 짓고, 참외와 멜론을 재배하는 집도 있다.

마을 뒤편 높은 자리에 능주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향교는 1392년 처음 지어졌다고 전한다.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서재 등이 멋스럽다. 600여 년을 산 암수 두 그루의 은행나무도 우람하다. 향교 활용 프로그램 운영시간 외엔 문이 굳게 닫혀있는 점은 아쉽다.

향교 앞에는 옛 관리들의 선정비가 줄지어 서 있다. 읍내 남산공원에 있던 지강 양한묵의 추모비도 여기에 옮겨져 있다. 양한묵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마을 뒤편 산자락에 양복사도 있다. 건축물의 위엄이나 고즈넉함보다는 편안함을 주는 절집이다. 몇 해 전엔 조광조 500주기 해원제를 열기도 했다.

남정마을은 인문학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문·사·철(文·史·哲), 문학과 사학·철학이 그것이다. 서 말의 구슬을 잘 꿰어 보배로 만들어야 한다. 어둠이 내려앉은 능주향교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돌리면서 드는 생각이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