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지리산 가는 길목… 사계절 관광객 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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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지리산 가는 길목… 사계절 관광객 북적
● 구례 문수마을
산수유…단풍…고로쇠 ‘인기’
주민들 펜션 등 숙박업 운영
능선으로 둘러싸여 여순사건 때
봉기군, 바위나 동굴 숨어 지내
반달곰 키우는 문수사도 가볼만
  • 입력 : 2023. 10.19(목) 14:53
지리산 문수골. 해마다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을 불러들이는 계곡이다.
산골짜기 비탈진 곳에 박혀 있는 다랑이가 정겹다. 좁고 긴 논배미가 누렇게 물들었다. 벼를 거둘 때가 가까워졌음을 직감한다. 마을 안길을 돌아 산자락으로 들어서니 길이 가팔라진다. 자동차도 숨을 몰아쉰다. 운전대를 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산등성이가 높다. 지리산의 형제봉과 왕시루봉이 섬진강 쪽으로 뻗은 능선이다. 노고단은 먼발치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동쪽과 서쪽, 북쪽이 전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골과 골 사이도 깊다. 맑고 깨끗한 물이 계곡을 따라 흐른다. 계곡이 10㎞가량 된다. 용소폭포도 비경이다.

산비탈에 들어선 집이 아스라하다. 오래된 집보다 새집이 더 많다. 외지인들의 별장이나 전원주택, 펜션으로 보인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사방을 돌아본다. 지리산의 자태가 늠름하다. 산봉우리에서 시작된 산자락은 섬진강으로 향한다.

물을 가득 채운 문수저수지 너머로 누렇게 물든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다. 어디선가 금목서의 진한 향이 날아와 코끝을 간질인다. 길섶에선 쑥부쟁이, 꽃향유, 꽃범의꼬리 등 가을꽃이 바람에 한들거린다. 꽃의 꿀을 찾아다니는 나비와 박각시나방의 날갯짓도 부산하다.

도로변 나무에는 빨간 산수유가 주렁주렁 열렸다. 해마다 샛노란 꽃으로 새봄을 가장 앞서 알려주는 나무다. 가을과 겨울엔 선홍빛 열매로 산골의 정취를 선사한다. 주홍빛으로 익어가는 감도, 밤송이를 벌린 채 떨어진 알밤도 지천이다.

지리산의 높은 봉우리와 산자락, 계곡을 따라가서 만나는 섬진강이 빚은 풍경이 한없이 평화롭다. 무릉도원이 여기인가 싶다. 조선의 화가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 같기도 하다.

참 좋은 지리산 문수골이다. 겨울의 끝자락에 고로쇠 약수를 찾아서, 새봄이 기지개를 켤 때면 노란 산수유꽃을 보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한여름엔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찾아든 피서객들로 북적인다. 가을엔 밤과 감, 산수유를 수확하는 주민의 손길로 분주한 산골이다.

가을이 무르익을 때면 현란한 단풍을 보려는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사철 언제라도 멋진 산골이지만, 가을에 더 아름다운 곳이다. 대한민국 국립공원 1호 지리산이 품은 문수골이다.

겉으로 보이는 풍경과 달리, 속살의 피멍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산골사람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때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10?19여순항쟁 때 문수골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봉기군의 이동 길이었다. 연달아 토벌군이 들이닥쳤다. 목숨을 내건 전투가 오랫동안 벌어졌다. 낮과 밤으로 이념을 달리해야 했던 문수골 사람들은 빨치산에 당하고, 국군에 당했다. 목숨이 수십 개라도 모자랐다. 생지옥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동족상잔을 불러올 제주 출동을 거부한 여수 14연대 군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봉기군은 여수경찰을 무력화시키고, 열차를 이용해 순천으로 향한다. 이튿날 토벌전투사령부가 창설되고, 순천 학구에서 봉기군과 토벌군이 마주한다.

영암촌 뒤편 산자락에 있는 동굴. 여순항쟁 때 봉기군들이 숨어 지낸 곳이다.
토벌군에 쫓긴 봉기군이 장기전을 위해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문수골은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능선으로 둘러싸인 골은 숨어들기에도 제격이었다. 경찰의 자료에 따르면, 문수골을 통해 지리산으로 들어간 봉기군과 좌익세력이 2000여 명에 달했다. 봉기군은 문수분교에 모여 대열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폐교된 토지초등학교 문수분교 자리엔 지리산 산간학교가 들어서 있다. 학교 마당엔 충무공 이순신과 ‘반공소년’ 이승복의 동상이 서 있다. 길게 뻗은 넝쿨과 이파리로 둘러싸여 제 모습을 감춘 동상이 눈길을 끈다. 이념에 따라 서로 죽고, 죽여야 했던 지난날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산간학교에서 마주보이는 영암촌 뒤편에 봉기군이 숨어지낸 동굴도 있다. 가파른 언덕과 수풀을 헤치고 만나는 동굴은 열댓 명이 머물만한 공간이다. 삭막하고 황량한 겨울산에서 벌벌 떨며 지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산골마을도 쇠락해 갔다.

“110여 가구 삽니다. 외지인이 훨씬 많죠. 원주민과 외지인이 따로 있답니까? 지금은 다 문수골 사람이지. 역사의 아픔도 깊고,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아직도 많아요. 지금은 하늘이 내려준 힐링 산촌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김종복 문수마을 이장의 말이다. 김 이장은 지리산 산간학교 교장과 지리산 산악구조대 대장, 피아골산장 관리인을 겸하고 있다. 40여 년 동안 지리산에서 ‘산꾼’으로 살고 있다.

구례군 토지면에 속하는 문수리는 상죽, 중대, 불당, 밤재 등 네 개의 작은 마을로 이뤄져 있다. 상죽(上竹)은 대나무가 울창했던 곳이다. 오미리 하죽(내죽)마을 위에 있다고 이름 붙었다. 중대(中垈)는 동학농민혁명 때 월출산 자락 영암에 살던 사람들이 관군을 피해 들어와 터를 잡았다. ‘영암촌’으로 불린다. 불당은 조선시대에 절집이 있었다고, 밤재(栗峙)는 밤나무가 많았다고 이름 붙여졌다. 밤재 옆에 ‘신율’도 있다. 감나무골은 여순항쟁 때 불에 타 사라졌다고 한다.

문수골 산비탈에 들어앉은 중대마을 풍경. 전원주택과 펜션이 많이 보인다.
주민들은 민박과 펜션을 통한 숙박업을 주로 한다. 갖가지 산나물을 정갈하게 다듬고 버무린 밥상도 차려낸다. 한봉, 고로쇠 수액 채취는 덤이다. 마을을 오가는 군내버스가 없는 건, 어르신들한테 큰 불편이다. 면소재지에라도 나가려면 택시를 불러야 한다.

문수사 대웅전. 3층 목탑 형태로 지어져 눈길을 끈다.
절집 문수사도 문수골의 보물이다. 백제 때 창건됐고, 임진전쟁 때 일본군에 의해 부서졌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요사채를 짓고, 3층 목탑 모양의 대웅전을 세웠다. 화순 쌍봉사와 함께 독특한 대웅전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주지 고봉스님이 반달곰도 키운다. 가슴에 V자가 선명한 반달곰이다.

산골의 오후가 부쩍 짧아졌다. 한낮의 햇살이 조금 누그러지는가 싶더니, 금세 바람결이 달라진다. 찬 기운이 느껴진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