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서석대>非情한 나라, 悲痛한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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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전남일보]서석대>非情한 나라, 悲痛한 추모
최도철 미디어 국장
  • 입력 : 2023. 10.30(월) 18:19
최도철 미디어국장
우리나라에는 진(鎭)이나 원(院)으로 끝나는 지명이 여러 곳 있다. 주로 군사요충지에 설치된 진은 해안경계부대가 있던 곳으로 노량진, 주문진, 초지진 등이 이에 속한다. 조치원, 사리원, 이태원 등 원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 등 공무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으로 흔히 역(驛)과 함께 사용됐다.

대개 역원(驛院)을 두면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의 이름도 원의 이름을 따라 부르는 일이 관례처럼 되어 왔던 것이다.

한양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원(院)이었던 이태원은 이 땅, 이 민족의 슬픔이 배어있는 곳이다.

이태원은 표기하는 한자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이(李)’를 써서 ‘이태원(李泰院)’이라 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진 ‘이태원(異胎圓)’으로 바뀌었다. 이후 효종때부터 다시 ‘배나무 리(梨)’를 써서 지금의 ‘이태원(梨泰院)’이라 고쳐 불렀다.

‘이태원(李泰院)’이 다른 민족의 태를 가진 곳이란 뜻을 지닌 ‘이태원(異胎圓)’으로 바뀐 사연이 애달프다.

임란 때 고니시 유키나카와 가토 기요마사는 경쟁적으로 진격해 가토는 남대문으로, 유키나카는 동대문으로 입성했다. 한양에 들어 온 가토부대는 이태원에 주둔하며 아녀자들을 겁탈하는데, 대부분은 피난을 가버린 지라 그 대상은 미처 피하지 못한 몇몇 여인과 이태원 황학골의 작은 절 ‘운정사’ 비구니들이었다.

아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치욕을 당한 비구니들과 여인들이 아이까지 낳게 된다. 절까지 타버린 터라 마땅히 그 아이들을 기를 곳이 없자 조정은 보육원을 지어 정착하게 했는데, 당시 왜놈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이라 하여 이태원(異胎圓)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후 효종은 지명에 담긴 뜻이 분했는지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란 의미를 담아 ‘이태원(梨泰院)’이라 고쳐 부르게 했다. 이후에도 이태원은 일제 강점기때 일본군사령부가, 임오군란때는 청나라 부대가, 광복후에는 미군이 차례로 진을 쳤다.

지난 해 10월 29일.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가 스며있는 이태원에서 대참사가 일어났다. 핼러윈축제장에 나온 159명의 젊은이들이 인파에 떠밀려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했다. 참사 1주기를 맞은 지난 주간 위로와 연대, 공감의 마음으로 전국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치러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가족들이 바라는 진심어린 사과나 진실 규명의 목소리는 그 어느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참으로 비정한 나라요, 비통한 추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