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글로벌에세이·최성주>핍박받던 백성의 삶을 깊이 고민한 현실적인 사상가 ‘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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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글로벌에세이·최성주>핍박받던 백성의 삶을 깊이 고민한 현실적인 사상가 ‘다산’
최성주 원자력대학원 교수·전 주폴란드 대사
82) 남도에서 찾은 다산(茶山)의 발자취
  • 입력 : 2023. 11.28(화) 12:57
최성주 교수
필자가 전남도청에서 국제관계대사로 근무한 지도 어느새 10년이 지났다. 그 당시, 필자는 출신도(道)에 대해 공부한다는 마음을 갖고 시간이 나는 대로 지역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그런 중에 찾은 곳이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이다. 이를 계기로, 다산의 발자취를 찾아 강진 사의재 및 백련사는 물론, 해남 녹우당 등도 답사했다. 다산은 18년간 강진의 유배지에서 불우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불후의 저서를 남긴다. 또한, 유배지에서도 추사, 혜장, 초의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교류하며, 사상, 철학 및 문화예술을 발전시킨다. 다산의 강진 유배 시절을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해 본다.

조선 시대, 정조는 다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는 정조일 수 있었고,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은 정약용일 수 있었다.”고 설파했다. 다산의 귀양살이도 정조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은 업보다.

1800년 개혁군주인 정조가 돌연사하자, 정순왕후 등 다산에 대해 그간 앙심을 품어온 세력들이 그를 제거하려 나선다. 1년 후,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신유박해)로 다산의 일가친척들은 처형과 귀양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으로 내몰린다.

그의 형들 중에서, 기독교인 약종은 참수된다. 다산은 둘째형 약전이 평생을 통해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라 칭했다. 약전도 다산을 자랑스러운 동생으로 여겼다. 각각 강진과 흑산도 유배형에 처해진 다산과 약전은 나주 인근 율정에서 하루를 묵은 후 기약 없는 길을 떠난다. 다산은 다산초당 옆 언덕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흑산도에 유배 간 형을 그리워했다. 약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전문서인 ‘자산어보’를 저술한 후,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형의 부음을 뒤늦게 접한 다산은 강진만의 바다를 쳐다보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다산이 처음부터 다산초당에 기거한 것은 아니다. 유배 초기 4년 동안에는 강진의 주막집 골방에서 지냈는데, 실의에 빠져있던 그에게 주모는 무엇인가 의미있는 일을 하라고 일깨운다. 그 후, 다산은 마을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이 주막집을 ‘사의재’라고 칭한다. 그는 평소 외가(해남 윤씨)를 자랑하곤 했는데,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가 해남 윤씨 집안의 대표적 인물이다. 사실, 다산(茶山)이라는 이름은 야생 차나무가 자라는 귤동의 뒷산 이름에서 유래했다.

해남 윤씨 집안의 윤단은 다산의 거처를 자신의 초당으로 옮겨준다. 다산은 강진 만덕산 기슭에 위치한 이 초당에서 10년간 귀양살이하면서 18명의 제자와 분업 방식으로 수백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긴다. 당시, 그는 자신의 호를 ‘다산’으로 바꾼다. 그의 호는 삼미, 열수, 사암 등 20개가 넘을 정도로 많다. 주로 자신이 기거하던 지명에서 호를 따곤 했다.

도청 근무 시절, 필자는 종종 주말에 ‘뿌리의 길’-다산초당-백련사 구간을 산책했다. 다산의 야생 차나무와 백련사의 빨간 동백꽃이 생각난다. 다산초당과 백련사에 기거하던 다산과 혜장 스님이 차담하기 위해 오가던 그 길이다. 그런데, 차문화에 관한 한, 초의 선사를 빼놓을 수 없다. 나이로는 다산의 아들뻘이던 그는 진정한 다인(茶人)인 다산으로부터 차에 관해 많은 걸 배워, 이를 자신의 저서인 ‘동다송’에 정리한다. 초의와 동갑내기인 추사도 차를 매개로 초의와 교류하며 차문화 발전에 기여한다. 제주도에서 장기간 귀양살이한 추사도 다산의 학예와 인품을 존경하고 보배롭게 여긴다는 의미에서 ‘보정 산방’이라는 현판을 남긴다. 한편, 다산은 귀양지에서도 자식들에게 서한을 보내 필독서를 지정해주며 독후감을 써 보내라고 요청한다. 비록 집안이 폐족(廢族)이 되었더라도 책을 가까이하고 학업에 정진하도록 다그친다. 과거에 응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과거공부로 학문의 영역이 좁아지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면서 격려한다. 둘째 아들인 학유는 유명한 ‘농가월령가’를 저술한다.

조선 최대의 학자로 꼽히는 다산은 평생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정치 및 경제, 사회, 문화, 건축, 군사, 의학 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이고, 2천 수가 넘는 시(詩)도 지었다. 다산은 2012년 유네스코가 뽑은 전 세계 4명의 기념 인물에 선정되었을 정도다. 그는 주자학이 공자의 본원 유교를 잘못 해석하면서 중세의 논리에 갇혀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다산의 진정한 위대성은 핍박받던 백성의 삶을 깊이 고민한 현실적인 사상가였다는 점에 있다. 이점에서, 그는 복지를 우선에 둔 행정 및 이를 통한 신세계를 꿈꾸었던 개혁가다. “위엄은 청렴에서 나온다”는 그의 목민 철학은 공직자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통시대적 메시지이자,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