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소외되고 버림받아도 돌아올 수밖에 없는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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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소외되고 버림받아도 돌아올 수밖에 없는 고향
387)귀신들의 땅
“소외 받고 버림받은 이들이 정작 귀신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는 땅이라면 장차 귀신의 날에 맛나고 푸짐한 음식들을 먹은들 그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입력 : 2024. 03.21(목) 10:58
장편소설 귀신들의 땅 표지.
“귀신들의 땅은 황량했다. 그렇다면, 귀신은 정말로 있는 걸까. 시골 들판에는 도깨비들이 무수하고, 그들 대부분은 사람들의 입속에 살고 있었다. 한 줄로 늘어선 이 타운 하우스 앞에는 무성한 대나무 숲이 있다. 사람들은 그곳에 여자 귀신이 날아다니니까 절대로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대나무 숲 여자 귀신은 일제 강점기에 강간당한 여자로, 정절을 훼손당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쫓겨나 대나무 숲에서 목을 맸다고 한다. 이때부터 귀신이 되어 오직 젊은 남자들만 유혹한다고 했다.”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에 피가 흐르는 이미지, 조선 시대의 귀신 혹은 여고괴담 시리즈 영화를 닮았다. 하지만 대만 이야기다. 근자에 한국어번역본이 나오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장편소설, 천쓰홍의 『귀신들의 땅』(민음사) 한 대목이다. 설정이나 묘사가 비슷한 것은 한국과 대만의 정서가 그만큼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와 가장 닮은 나라를 꼽으라면 일본보다 대만을 들기 일쑤인 까닭이기도 하다. 흔히 슬픈 공화국으로 호명되는 대만, 일제 강점기를 겪은 나라, 정치적 경로나 미국과의 관계, 경제적 위상 등 닮은꼴들이 많다. 주인공의 성장소설이자 가족소설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성소수자로 성장하면서 겪는 에피소드, 누나들의 소외, 자살과 살인, 일본과 독일의 제국 이데올로기 등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이 수많은 인물, 특히 귀신들에 의해 발설된다. 내 소설 읽기가 서툴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만 이야기인데도 줄거리마다 한국이 오버랩되는 것은 한국 또한 귀신들의 땅이어서일까? 등장인물과 또 다른 등장인물인 귀신들이 화자가 되어 장면을 이끌어나가는 기법이 채용되었다. 자극적인 동성애나 자살 등의 묘사가 당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진솔한 태도로 읽히는 것인지, 젊은 작가 중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귀신들의 출처,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



톈홍은 주인공이자 작가의 의역된 캐릭터다. 다섯 명의 딸과 형, 막내인 톈홍의 가족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고향에서의 동성애인이자 친구 샤오촨이 등장하고 독일의 동성애인 T로 장면이 이어진다. 다섯째 누나의 죽음을 비중있게 다룬다. 시골에 살던 톈씨 집안이 새로 지은 타운 하우스에 입주하는 것도 일종의 암시다. 오래된 숲을 밀어버리고 지은 타운 하우스 근처에 일본군에게 강간당해 죽은 여자 귀신이 남자를 홀린다는 대나무숲이 있기 때문이다. 온갖 귀신들을 모시는 묘당, 타이완의 경제적 발전 등이 대비된다. 무엇보다 버려진 동물과 사람들, 버려진 고향, 그러나 돌아올 수밖에 없고 돌아와야만 하는 그런 마음의 고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주인공이 대만으로 돌아오는 날을 중원절(中元節)로 설정한 것부터 의미심장하다. 일반소설과는 다르게 중간중간 각주형식의 낱말 풀이를 하고 있다. 중원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타이완에서는 음력 7월 15일을 중원절로 정하고 음력 7월은 귀월(鬼月)로 규정하여 모든 유형의 귀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절을 올려 건강과 사업의 번창을 기원한다. 음력 7월 1일에는 귀문(鬼門)이 열려 귀신들이 활동을 시작하고, 7월 15일에는 귀신들의 기운이 가장 세지다가 31일에 가까워지면 수그러든다.” 귀신들이 지상에 들어오고 나가는 달이니 어찌 보면 등장 인물군 대부분 귀신이면서 귀신의 화신일 수 있다는 암시다. 장윤선은 <조선의 선비, 귀신과 통하다>(디자인하우스)에 이렇게 말한다. “귀신담에 나오는 여성은 진정으로 가엾은 존재이다. 여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적 모순과 억압, 그로 인한 위협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남성의 등장, 그리고 그 남성의 배신이 아주 익숙한 그림으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오늘날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바로 이런 판에 박힌 주제가 전개된다.” 어디 여성뿐이겠는가. 성소수자, 장애인, 어린이, 외국인노동자 등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이들이 오버랩된다. 이미 귀신이 된 다섯째 누나가 이렇게 말한다. ““바람은 아주 거세게 불었어. 한여름 중원절에 불어온 이 차가운 바람은 몹시도 이상했지.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징쯔총이 보이지 않았고 밍르 서점은 영업을 중지했고 하마가 나왔어. 그리고 다섯째인 나도 보이지 않았지. 텐이는 소환장을 받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엄마도 세상을 떠났어. 집은 불타고, 소문에 의하면 막내 톈홍은 독일에서 사람을 죽였다더군. 쉬익. 바람이 불자 도마뱀들이 입을 다물었어. 귀뚜라미도 입을 다물고 개구리도 입을 다물고 흰개미도 입을 다물었어. 용징 전체가 입을 다물었어.” 톈홍을 묶어 놓고 때리고 강제로 성폭행하는 장면들, T는 성소수자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애인이자 자신을 억압하는 폭력을 넘어 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 읽힌다. 독일의 신나치와 오버랩된다. 톈홍은 마침내 동성애인 T를 살해한다. 억압의 주체를 제거하는 암시랄까. T를 살해하는 이는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만메이야 귀신이 되거든 꼭 그놈을 찾아가거라”라는 엄마의 애도이기도 하다. 자신을 버린 고향이며 사회이며 나라였지만 주인공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종국에 엄마가 내뱉는 이 말에 들어 있다. “쉿! 절대로 말하면 안돼. 대나무 숲의 여자 귀신은 바로 네 외할머니야. 엄마의 엄마란 말이야.”



남도인문학팁

소설 <귀신들의 땅>과 귀신들의 안식



원귀가 마침내 귀신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사람들의 입속에 살고 있다가 대나무밭이나 개천이나 버려진 고향으로 귀환한다. 오래된 숲을 밀어버리고 지은 톈씨 집안의 타운 하우스 또한 소외되고 버림받은 공간이면서 귀신이 되어서야 돌아오게 되는, 마침내 돌아올 수밖에 없는 고향이다. 중원절의 풍경이 여러 장면을 통해 세밀하게 묘사된다. “커다란 접이식 원탁을 펼쳐 놓고 닭과 돼지, 오리, 탕면, 마른 음식 등을 잘 배열한 다음, 원탁이 바깥쪽을 향하게 하여 집 밖에 내놓았다. 원탁 앞에는 깨끗한 물이 한 대야 놓이고, 물속에는 작은 수건이 하나 가라앉아 있어야 한다. 지나가던 귀신들이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 원탁에 차려진 잔칫상을 실컷 누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음식마다 선향(線香) 세 개가 꽂혔다. 결핍의 해일수록 원탁의 음식은 더 푸짐했다. 지전도 태워서 길 가던 귀신들과 혼귀들이 침울해하지 않게 했다.” 살아생전에 소외당하고 버림받아 귀신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귀신의 달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들의 땅 고향으로 돌아와 맛있고도 배불리 먹으며 위로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핍이 깊을수록 침울이 깊을수록 음식은 풍성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톈홍이 귀신의 달 중원절에 귀국한다는 설정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치고 힘든 영육을 비로소 위로받고 안식할 수 있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내내 우리나라를 생각했다. 내 고향, 내 사회, 한국이라는 이 나라가 사실은 천쓰홍의 소설처럼 귀신들의 땅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소외 받고 버림받은 이들이 정작 귀신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는 땅이라면 장차 귀신의 날에 맛나고 푸짐한 음식들을 먹은들 그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작가는 “용징은 존재했던 것일까”라고 반문한다. 성소수자로 낙인찍혀 탈출했던 고향 용징이 주인공에게 위로와 안식의 땅이었는지 혹은 땅이 될 것인지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다만 T에게 하고 싶었던 말로 이를 암시한다. “나는 이 귀신들의 땅에서 왔어. 여기가 나의 고향이야. 오늘은 중원절이라서 모든 귀신들이 돌아오지. 나도 돌아가야 해.”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