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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문법은 올려잡아 300여 년 전 생성되었다. 판소리라는 이름은 100여 년 전 만들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판소리의 총체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확정되었다. 지난 칼럼에서 다룬 판소리 내력이다. 이제 판소리를 '소리'답게 만드는 두 가지 기술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 두 가지 기술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탁월하다. 판소리를 이면(裏面)의 소리로 만들어낸 원천기술이다. 하나는 리듬을 일정한 패턴으로 범주화한 기술이다. 다른 하나는 선율을 일정한 방식으로 구조화한 기술이다. 전자의 기술을 장단(長短)이라 한다. 후자...
편집에디터2022.10.06 14:15공생원 사랑의 가족 기념비 윤학자 여사 제1회 목포시민상을 수상하는 윤 여사(1965) 윤학자 탄생지비(고지현) 윤학자 여사 가족사진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 1965년, 목포시는 '목포 시민의 상'을 제정하고 첫 수상자를 정하기 위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압도적 1위를 받은 분이 일본인 윤학자였다. 윤학자(尹鶴子, 1912~1968)가 얼마만큼 목포 시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인물인지는, 그가 1968년 폐암으로 타계했을 때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장에 3만여 명의 목포 시민이 참석, 그녀의 마지막을 애도한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시 목포의 인구가 16만 명 정도였으니, 조금 과장하면 목포 시민 모두가 운 셈이다. 그녀의 장례는 최초의 목포 시민장이었다. 그날 조선일보는 사회면 머리 기사로 "목포를 울린 장례식, 명복 빌어 첫 시민장"이라...
최도철 기자2022.10.05 16:152017년 영국의 미술 전문지 '아트 리뷰(Art review)'에서 미술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 된 미디어 아트 작가, 영화감독, 비평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독일 뮌헨 출생, 1966~)은 디지털 기술 기반의 데이터 사회를 성찰적 다큐멘터리 및 연구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파리 퐁피두센터, 런던 서펜타인갤러리 등에서 주요 개인전 및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에서 전시를 선보였으며 모마, 테이트 모던,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Moma), 퐁피두 센터, 노이어 베를리너 쿤스트 페어라인 등 주요 세계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스크린의 추방자들〉, 〈면세 미술: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 등 다수의 저서도 미술계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히토 슈타이얼의 작업과 저서에서 선보인 주요 개념은 '포스트 재현(Post-representati...
편집에디터2022.10.05 09:59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K-Food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우리말 '한식'을 영역한 것이 'K-Food'이다. 하지만 한글과 영문의 결이 좀 달라 보인다. 남도음식 또한 마찬가지다. '한식(韓食)'은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이나 식사를 말하는 것인데, 지금 논의되는 K-Food를 딱히 그렇게 정의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음식문화가 식료에 한정되거나 시대에 묶여있지 않고 시절 따라 기호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지금 서구화된 우리의 식단이 그렇고 세계인의 기호 음식이 된 커피 사례가 그렇다. 주지하듯이 K-Food가 부상...
편집에디터2022.09.29 16:31그동안 코로나 대유행으로 좋아하는 여행도 즐기지 못해 답답했는데 이번에는 세계 경제를 휘어잡고 있는 달러가 초강세인 것이 문제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더 가난해지고 말았다. 이제 해외여행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이다. 4차산업 운운 하면서 세상이 갈수록 더 좋아질 것 같이 말하는데 적어도 우리들이 누리는 행복감은 여러 면에서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인간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거니 해버리면 속이라도 좀 나아질까 요즘 들어 부쩍 세계의 봉이고,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우리지만, ...
편집에디터2022.09.29 16:112010. 추자도 조기축제에서 풍어제 주관하는 송순단 무녀 판소리란 작명은 언제 어디서 누가 한 것일까? 판소리의 생성은 영조 30년(1754) 유진한이 지은 춘향가를 기점으로 잡는다. 250여 년, 당시 이 노래가 존재했었으니 더 올려잡아 300년 남짓 된 셈이다. 하지만 이때부터 지금의 호명인 '판소리'가 있었던 게 아니다. 타령, 창(唱), 잡가(雜歌), 소리, 광대소리, 창악(唱樂), 극가(劇歌), 가곡(歌曲), 창극조(唱劇調)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이 중에서 어떤 이름이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판소리라는 명칭이 나타난 것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1940년 조선일보 출판)이다. 올려잡아도 100여 년 밖에 안된다. 더구나 판소리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다. 정노식이 왜 '조선판소리사'라고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보라. 판소리 만정(김...
편집에디터2022.09.22 16:31바오다이의 여름별장 외관. 차노휘 유럽의 집과 건물을 자세히 보면 창 모양이 다르다. 한국의 창문 형태가 가로가 길고 세로가 짧다면 유럽은 가로가 짧고 세로가 길다. 창 하나의 크기도 작을뿐더러 건축 면적에 비해 창문 개수도 적다. 유럽은 건축 자재가 돌과 벽돌이 주재료이다. 이 단단한 벽이 지붕을 떠받치는 형태이다. 벽 중심의 건축물은 가로로 널찍하게 창을 내면 벽돌의 하중을 견디기가 어렵다. 그래서 창의 가로 폭을 줄이고 대신 세로로 길쭉한 창을 내게 된다. 뿐만 이런 형태의 창문 모양은 세금 때문이기도 했다. 그 당시 영국은 세금을 걷기 위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그 중 하나가 '창문세'이다. 18세기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앙숙인 영국이 창문세를 거둬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게 꽤나 부러웠다. 그는 창문세를 도입하되 창문의 개수를 기준으로 하는 영국과 달리 창문 ...
편집에디터2022.09.22 16:29강항 동상. 내산서원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 성회를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자는 것이오,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라남도 도민 아니, 우리나라 대한민국 모든 민족이 온누리에 횃불을 밝히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민족민주화성회 때, 박관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의 연설이다. 말 그대로 열변을 토한 사자후였다. 광주시민의 심금을 울린 그는 이 집회를 이끌면서 '광주의 아들'로 거듭났다. 박관현동상. 그의 태 자리에서 가까운 불갑테마공원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박관현(1953∼1982)은 영광군 불갑면 쌍...
편집에디터2022.09.22 16:33이광사 문화거리에 설치된 '서결' 기념물 동국진체의 완성자, 이광사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의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 글씨는 추사 김정희와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1세기 정도 후대의 인물인 추사가 1840년 제주도로 귀양가던 중 초의선사를 찾아 대흥사에 들른다. 그리고 원교가 쓴 '대웅보전'의 현판을 보고 촌스럽다고 깎아내리면서 떼어내고 자신의 글씨로 대신하게 한다. 조선적인 조형성을 추구한 동국진체에 대해 추사는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 유배가 풀려 8년 만에 다시 대흥사를 찾은 추사는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찾아 걸도록 했다. 중국 중심의 전통 서법을 추구했던 추사도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의 진가를 인정한 것이다. 이광사는 김정희의 마음을 미리 예견했는지 "마음의 바탕이 밝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학식의 도량이 ...
편집에디터2022.09.15 13:58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무안학 심포지움을 열었다. 무안군 후원 무안문화원 주최 프로그램이다. 우후죽순 지방학이 생겨나는 와중에 아마도 꼴찌로 이름을 올린 게 아닌가 싶다. 내가 2년여 두 번의 기획과 섭외 등을 맡아 진행해서가 아니라, 향후 지역학을 고민하고 구성해나갈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페이스북에 간략한 성과를 공유하였고, 오프라인의 독자들을 위해 다시 풀어쓰는 셈이다. 그동안 몇 차례 무안학이라는 이름으로 발표와 토론이 있었지만 등 지역연구의 맥락을 넘어서는 지역학 화두를 내걸었다. 무안문화원 이...
편집에디터2022.09.15 17:10압록강을 건너고, 구련성에서 호랑이를 쫒다가 책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청나라에 들어서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사신단의 먹을거리와 잠자리는 청나라쪽에서 제공한다. 멀리서도 우뚝솟은 것이 바로 봉황산이다. 여기서 연암 박지원은 기운이 힘차보이기는 하나 밝고 윤택한 기운은 한양의 도봉산이나 삼각산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정말 그런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가 고구려 최고의 요새였던 봉황산성이 잃어버린 안시성을 생각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곳이다. 800m 높이의 봉황산과 고려성자산의 산새가 자연 성벽이고, 그 사이의 좁은 남문과 북문만...
편집에디터2022.09.15 15:461971년 미국의 미술잡지 Artnews 1월호에 실린 에세이에는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 "왜 지금까지 위대한 여성 예술가가 없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당시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사실 50여년이 흐른...) 지금도 미술사의 주 이론으로 적용되던 사고들은 현대 미술사에 권력으로 독점한 백인 남성들의 성차별적인 구조 뿐 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로확장되어 사회적 이슈의 숙제로 남아있다. 노클린은 '예술이란 오로지 천재적 재능을 지닌 한 개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발생 한다.' 는 점을 지적했다. 여성 천재 미술가가 탄생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 환경과 교육제도 때문이라는 것이 질문의 주요 관점이었다. 이후 '페미니즘feminism' 미술...
편집에디터2022.09.04 17:20죽림사원. 차노휘 베트남 사람들 70%가 불교신자이다. 그 뒤를 가톨릭(20%), 까오다이교(5%) 그리고 민간 토속신앙이 잇는다. 다소 생소한 까오다이교는 20세기 초에 생긴 베트남에서만 볼 수 있는 신생종교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듯 불교, 가톨릭, 도교, 유교, 이슬람 다섯 신을 모신다. '높은 곳을 보게 되(높은 곳을 가게 되)면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데, '까오다이(高台)' 또한 '높은 곳'이라는 의미로 신이 있는 곳 즉, '천국'을 가리킨다. 인류구원의 날에 천안이 나타난다고 믿는데 '천안(天眼)'은 지구본처럼 생긴 둥근 '눈'이며 이 종교의 심벌마크이다. 불교 또한 지난한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수난을 겪었다. 대표적으로 '틱꽝득(석광덕, 1897~1963)' 스님의 소신공양을 들 수 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부처에게 공양...
편집에디터2022.09.01 16:32영화 왕의 남자 광대들의 연희장면. 맥스무비에서 캡쳐 "근데 그때는 뭐, 광대 뭐, 딴따라 뭐, 이럴 때지(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4)." "그러니까 떠돌이들은, 유랑극을 하는 사람들은 조심을 해야된다. 이래가 부모들이 말렸어요(한국영화사연구소, 2010)." "영화 한다고 그러께네 뭐 뭐 기생 사람 된다카고 뭐. 그때 영화라는 게 인정도 안 했지, 그래께 내가 몰래 나왔지(한국영화사연구소, 2007)." "어어, 그리니까 완고하지요. 그니까 풍각쟁이한테 누가 딸을 주겠느냐(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5)." "아, 보나 마나 그런 딴따라니까, 이혼했지(한국영화사연구소, 2009)." 이승연의 '서사를 통해서 본 1950~60년대 대중문화 예술인의 정체성-예술관과 직업관을 중심으로(인문사회 21)'라는 글의 인용문들이다. 광대, 딴따라, 떠돌이, 풍각쟁이는 물론이요, 각설이, ...
편집에디터2022.09.01 16:24법화마을 표지석.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장성에선 인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벌교에 가면 주먹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말이다. 나름 고개가 끄덕여진다. 바다가 넓은 여수는 고기잡이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다. 장성은 학덕 높은 하서 김인후와 고봉 기대승, 노사 기정진의 영향이 크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벌교는 주먹과 무슨 상관이 있지? '벌교 주먹'에는 왠지 좋지 않은 이미지가 앞선다. 벌교에 폭력을 쓰며 행패를 부리는 깡패가 많았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말이나 행동이 거친 왈패가 많았을까? 궁금증이 에서 풀린다. 일제강점기 의병들의 투쟁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벌교주민(한만호, 손공현)의 구술이었다. '장터에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다가 보니께. 일본 헌병들이 조선사람 장사...
편집에디터2022.09.01 1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