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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알곡들이 튀어 오르는 소리일까. 어떤 생명이 땅속을 헤집고 올라오는 진동일까. 파도 알갱이들이 서로 부딪치는 풍경일까. 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라는 상투적 표현만으로는 다 말하기 어려운 청아한 음들의 향연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들으면, 재잘거리기도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며 새싹 오르는 뒤꼍이며 고샅이며 매화봉우리 터지는 나무 곁을 종종걸음으로 달려 다니는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이 아니라도 좋다. 어미를 쫓아 장난질하는 강아지들 혹은 고양이어도 무방하다. 통통 뛰어다니는 선율을 따라잡는 앵글이 분주...
2025.03.20 16:25다랑쉬 동굴 입구, 스산한 날씨였다. 2019년 8월 작곡가 김대성의 대표곡 ‘다랑쉬’가 연주되는 현장, 뒤덮인 칡넝쿨의 우듬지들이 해금 연주자 박솔지의 선율을 타고 울렁거렸다. 진한 슬픔의 곡조로 흐르는 선율임에랴 어찌 흔들리지 않을 잎이 있을 것이며 떨지 않을 가지가 있을 것인가. 낯익은 선율인 듯도 싶고 어쩌면 낯선 선율일지도 모를 이 가락을 듣자마자 나는 남도의 진계면 육자배기를 떠올렸다. 육자배기가 아니고서야 내면의 아픔을 이토록 헤집어놓을 수 있을까 싶었다. 이 곡이 발표된 것은 이보다 20여년 앞선 2002년이다. 해금...
2025.03.13 17:47언제부턴가 산티아고 순례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직장에 다니는 이들 중에는 퇴직 후 산티아고 길을 걸어보는 것이 로망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거기에 무엇이 있길래 많은 사람이 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야고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걸었던 이베리아반도가 순례길의 전거라고 하니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들일까? 그것은 아닌 듯하다. 오늘은 산티아고라는 이름에서 따왔을 것이 분명한 ‘섬티아고’를 소개한다. 신안군 기점도와 소악도의 4개 섬을 잇는 길이기에 ‘섬+티아고’다. 증도면 병풍리에 속한 섬들이다. 이곳에...
2025.03.06 18:02보타산(普陀山)은 ‘보타도’라고도 한다. 중국 절강성 주산군도에 있는 불교 성지다. 인근에 있는 ‘락가도’와 더불어 관음 신앙의 두 축을 이룬다. 산스크리트어로는 포탈라카(Potalaka)라 한다. 한자로는 보타락가(補陀落迦)다. 관음보살이 산다는 전설의 산이자 섬이다. 남인도에 설정된 가상의 공간(실제 섬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불교 경전 ‘화엄경’에서 선재 동자가 관세음보살을 만나는 장면을 그린 것이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이다. 참고로 관음(觀音)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준말로 아미타불의 왼편에서 교화...
2025.02.27 17:28“밥 먹어라!” “정돌이 밥 먹었니?” “귀철아, 밥 먹었어?”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일 수도 있을 인사말이 두고두고 머릿속을 배회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정돌이’(김대현 감독, 2월18일 광주 독립영화관) 얘기다. 14살 가출 소년 송귀철이가 고려대에 스며들어 성장하는 과정을 소재 삼은 영화다. 초점은 고려대를 중심으로 한 1980년대 학생운동의 내력에 있다. 어린 송귀철의 시선으로 학생운동 장면들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 미묘하다. 전찬일 영화평론가가 다큐멘터리 ‘정돌이’를 소개하면서 울먹거리는 모습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이...
2025.02.20 17:33지난해 11월 고흥분청문화박물관, 천경자(1924~2016, 본명은 玉子)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열렸다. 성황을 이룬 관람객들 틈새에 끼어 고흥사람 천경자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 9월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는 남도문화자원연구원 주관으로 한창기와 천경자를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가 열렸고 답사가 이어졌다. 두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바들을 정리해 두고자 했으나 차일피일 해를 넘기고 말았다. 늦긴 했지만 적어도 몇 번은 짚어두어야 할 남도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내 게으른 탈고를 채근 중이다. 그저 생각했던 것은 내 전...
2025.02.13 18:01붉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었다. 며칠 밤낮 동굴에 몸을 숨겼다가 연두색 바람이 시작하는 날에야 간신히 동굴을 나왔다. 동굴 안의 그이를 불러낸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나서였다. 연푸른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새로 난 일곱 색깔 바람들이 엉키기 시작했다. 애무하는 것인지 밀어내는 것인지 난무(亂舞)의 행로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바람에게 색깔을 입힐 수 있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이런 서술이 가능하리라. 어디 바람뿐이랴. 하늘에서 내리는 빛이야말로 사실은 색깔 자체 아니던가? 빛의 삼원색에서 색의 삼원색이...
2025.02.06 17:15북소리 둥둥 징소리 꽝꽝/ 장구는 동당동당 각(角)은 뛰~뛰/ 깃발은 펄럭펄럭 춤은 사뿐사뿐/ 짐승 얼굴 사납고 호랑이 모자 드높네/ 집뜰 우물 부엌에서 우렛소리 땅을 울리며/ 나아갔다 물러났다 조수처럼 분주하네/ 문호(門戶)의 신령께 새로 치성을 더하니/ 숲과 시내 도깨비들 도망가기 바쁘네/ 종규(鍾馗)가 눈동자를 움켜쥐고 서서 먹고/ 피를 뿜어 불 만들어 온몸을 태우네/ 귀신도 간 있다면 떨어지고 말았을 터/ 살려달라 애걸하며 머리를 조아리다/ 후다닥 정신없이 문밖으로 도망쳤나/ 천지가 말끔하고 달과 별이 찬란하네/ 징을 치고 ...
2025.01.30 18:23을사년을 푸른뱀의 해라고 하니 푸른색이 어쩌고 뱀이 어쩌고 호들갑을 떨었다. 예외 없이 질문이 들어온다. 그거 음력 설날 기점 아닌가? 맞다. 갑오개혁 이후 태양력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니, 본래 음력 설날이 육십갑자 구성의 기점 아닌가 말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2025년 시작되던 날 본 칼럼을 통해서 을사년과 뱀의 의미를 말한 바 있다. 설날이라는 기점이 동짓날, 양력 설날, 음력 설날, 입춘, 심지어 삼월삼짇날까지 변화해 왔다. 설날이 고정되어 있던 게 아니다. 물론 오랫동안 음력을 사용해 왔으니 그...
2025.01.23 17:52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체포하는 것으로 응원봉 혁명이 일단락됐다.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성명을 발표해 우리를 지지했다. “미국은 한국 국민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한다. 법의 지배에 대한 우리 공동의 약속을 재확인하고, 한국과 한국 국민이 헌법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기울인 모든 노력에 감사한다.” 윤 수괴의 계엄령 선포와 의회의 해제 가결 이후 헌법적 절차대로 꾸준하게 진행되는 민주 질서 회복에 대한 지지 성명이다. 미국뿐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모토 삼는 세계의 여러 나라가 이른바 응원봉 혁명의 과정을 생중계하듯 지...
2025.01.16 18:202024년 12월3일 오후 11시, 대통령 윤석열에 의해 위헌·위법한 계엄이 선포됐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10월 유신 이후 52년 만에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이자 내란이었다. 다행히 국회의 계엄해제 가결로 일단의 수습을 했지만, 온 국민 모두 가슴을 쓸어내린 시간이었다. 계엄해제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다. 그중에서도 발 빠르게 대처했던 국민들의 마음이 핵심이라는 게 중론이다. 전남대 박구용 교수는 이를 학습된 효과라고 말한다. 동학으로부터 5·18에 이르는 시민들의 학습과 경험이 일촉즉발의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2025.01.09 18:05육십갑자로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은 음력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굳이 따질 필요 없다. 양력이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설날이라는 기점이 동짓날, 양력 설날, 음력 설날, 입춘, 심지어 삼월삼짇날까지 변화해 왔음을 상기한다. 동짓날이 고대의 설날이었다는 점은 팥죽 한 그릇 먹어야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관념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고대 마한의 설날이 씨뿌리는 오월 며칟날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설날이 4월의 송끄란(물 축제하는 날)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무엇이 시작이고 무엇이 마무리인지, ...
2025.01.02 18:19어느 자리에서 목포대 강봉룡 교수가 ‘역사도 문학이다’라고 언명한 데 대해 나는 이렇게 호응했다. ‘문학도 역사다.’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답한다. ‘갯돌도 역사다. 피 터지는 목청으로, 울부짖는 몸부림으로, 마치 해마다 당산목에 새로 감기는 왼새끼줄처럼 비틀고 꼬아서 맨땅에 써 온 남도의 역사다.’ 10여년 전 마당극패 ‘갯돌 30년사’의 헌사(獻辭)를 이렇게 시작했더랬다. 그로부터 다시 한 순(旬)을 넘긴 모양이다. 지난해 ‘갯돌 40년 대본집’이 출판돼 나왔다. 대전의 ‘우금치’, 광주의 ‘신명’, 부산의 ‘자갈치’, 진주의...
2024.12.26 17:05지난 동짓달 그믐, 국립남도국악원에서 큰 잔치가 열렸다. 진도학회 창립 4반세기 기념 국제학술난장, 학회 설립을 주도했던 이토아비토 교수와 전경수 교수 두 석학이 진도군수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이토아비토 동경대 명예교수, 2024년 올해까지 53년째 한 해도 거스르지 않고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를 찾았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곳을 촬영하고 기록했다. 그래서 나는 이 학술난장을 기획하며 ‘어느 외국인이 사랑한 진도사랑 반백 년’이라는 카피를 썼다. 한국과 진도 관련 저술이 많지만 그중에서 이번에 번역되어 나오는 ‘문화인류학자의 한...
2024.12.19 16:44지난 2023년 5월 6일~7일 김지하 시인 추모 1주기에 열린 기념 학술회의 자료가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채희완 교수의 발제를 받아 토론한 졸고도 함께 실렸다. 석학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큰 영광이다. 내 토론의 일부를 여기 오려 붙여 출판을 기념한다. 목포 나들목 건너편에 용당리가 있다. 김지하의 초기 시, 어쩌면 그의 생애 첫 번째 시상이었을지도 모를 ‘용당리에서’를 떠올린다. 김선태가 쓴 ‘김지하의 첫 시집 황토와 목포’에 의하면, 4·19혁명 참가 후 고향 목포로 숨어들어 항만과 도로공사판 인부로 일하며 도피 생활을 하던 ...
2024.12.12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