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 순천 겸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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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옥연의 문향
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 순천 겸천서원
“멸문지화 당하더라도 충(忠)의 깃발을 올려라” ||충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삼문칠충의 절의
  • 입력 : 2019. 08.29(목) 12:43
  • 편집에디터

죽림마을 앞에서 바라본 겸천서원, 상호정, 영모재 전경(백옥연)

처서(處暑), 더위가 멈춘다는 뜻이니, 여름은 여기서 정지한다. 짱짱하던 볕의 기운이 한풀 꺾이고 조석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때. 만물은 겉으로 그만 크고, 속으로 여문다. 사람도 키가 부쩍 크다가 어느 때 멈추고 철이 드는 것처럼, 외형보다는 내면이 살찌는 시기이다. 마지막 노염(老炎)은 오곡이 여물고 과일에 단맛이 스미도록 제 역할을 다하고 사라질 것이다. '깐깐 5월, 미끈 6월, 어정 7월, 동동 8월'(음력)이라 한다. 오뉴월 모내기 김매기로 정신없이 보내다가 8월 추수를 앞둔 지금이 좀 어정쩡하다는 말이다. 어정은 말을 그래 붙여놓은 것이지, 사실은 기다림이다. 무엇이 완성되기 까지 기다림 없는 것은 없으니까. 그래서 8월 보름 추석 앞에 7월 보름 백중(百中)이 있다. 백중은 실컷 노는 날. 호미 씻어 흙벽에 걸어놓고, 장구 꽹과리 들고 나가 농악을 울리고, 양반춤 병신춤 길놀이 지신밟기 그런 온갖 놀이를 즐기는 '머슴의 생일'이자 민중의 명절이다. 그을고 고단한 삶 속에서 하루, 한 숨 돌리고 허리 한번 펴는 날이다. 처서가 지나고 어느덧 가을이 사립문 안으로 들어왔다.

순천시 주암면 죽림(竹林)마을. 처음엔 대숲골이라 불리다 숙종 때(1711) 겸천서원이 건립되면서 서원마을이라 했고, 조선 중엽에는 죽림마을이 되었다. 동쪽은 모후산, 남쪽은 조계산이 솟아있고, 마을 뒤편이 울창한 대숲이고 겸천이 흐른다. 이 마을은 100여 가구가 사는데 70%가 '옥천 조씨'다. 지금은 두루두루 외지로 떠나갔지만, 마을에 겸천서원, 상호정, 영모재, 정려 등 옥천 조씨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은성했던 옛 모습을 보여준다. 오랜 세월의 흔적들이 배어 있는 기와지붕과 목재들, 그리고 지붕이 연결된 당우들이 세 영역으로 나뉜 옛 건축물의 배치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겸천문을 들어가면 좌로 첨모문, 우로 영모문이 자리한다. 다시 첨모문을 들어가면 상호정이, 영모문을 들어가면 영모재가 있다. 바로 직진하면 상호정 뒤편에 겸천서원이 있다. 옥천 조씨 입향조인 전부정 조유, 조숭문, 조철산 등의 충절을 기리고자 호남사람들이 발의하여 1711년 건립되었다. 계유정난 때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은 김종서, 박중림, 박팽년 등 순천을 관향으로 하는 충신들도 함께 배향되어 있다.

조유(趙瑜 1346~1428)는 옥천조씨 순천 입향조로 자는 유옥, 호는 건곡으로 옥천부원군 원길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급제하여 전농시부정에 까지 올랐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여러 차례 영광군사와 한성판윤의 벼슬을 내렸으나 불사이군이라 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 72현 중 한분이다. 고향인 순창에서 지내다 만년에 지금의 순천 주암면 일대로 옮겨 옥천 조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했다. 어머니 상을 당해 곡진하게 상례를 치르고, 아버지 상에도 흙을 져다가 쌓아 장례하며, 어머니를 함께 부장했다. 얼마 후 서모 상을 당했는데, 생모처럼 예를 다했다. 모두 여묘살이 삼년을 살면서 날마다 곡을 하고 슬퍼하였다. 세종은 <효자전부정조유의 정려>라는 정려와 묘지기 3호(戶)를 같이 내려주었다. 사암 박순은 조유의 충절에 대해 "남쪽 지방에서 절의를 지킨 사람은 오직 조부정 한 사람뿐이었다"라고 했다. 세종도 정려를 내리면서 전부정이라는 고려시대 관직을 사용하게 해 그의 절의를 높게 평가했다.

조유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큰 아들은 참의공 조사문, 작은 아들은 세종 대에 무과 급제 후 병마절도사에 이른 절민공 죽촌 조숭문이다. 상호정은 사문(斯文)의 아들 지산과 지곤(智崑), 지륜(智崙), 지강(智崗) 등 동생들과 함께 지은 정자다. 이들 형제는 아침저녁 정자에서 만나 우애를 나누고 낮에는 음악과 시문(詩文)을, 밤에는 고금의 역사와 학문을 토론했다 해서 '상호(相好)'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형제 우애의 표상이 되었으며 상호정파라고도 불린다.

계유정난 1453년. 수양대군이 여러 대신들을 죽이고 반대파를 숙청하여 왕위를 찬탈한 사건이다. 절의에 찬 선비들은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탄로가 나 수많은 신하들이 화를 입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이개, 그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 부르고 의로움의 화신으로 숭앙하지만 이제껏 단종 복위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선비로 기억되지 못한 이름이 있다. 조선의 역사를 뒤흔든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지켜보며 집안에 큰 화를 불러올 것을 알면서도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순천의 조사문, 조숭문 형제와 숭문의 아들 조철산 역시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사육신과 함께 아버지 죽촌공 조숭문의 가르침에 따라 부자가 같이 순절하였고 조사문도 동생이 애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해 달라는 말에 돌아가다 순천에서 체포, 압송하는 과정에서 전주에서 처형되었다. 숙종 대에 와서 신원이 회복될 때까지 가문에 닥친 불행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숙종 때 절민공, 교관공의 시호를 얻으며 역적에서 벗어나 부끄럽지 않은 의로움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삼문칠충을 배향한 겸천서원은 바로 역사가 된 의로운 정신의 산실로 500여년이 지난 세월동안 충과 효, 우애와 의로움을 오롯이 전하는 공간이다. 오랜 시간 후손들에게 내려온 겸인오덕(謙認悟德)과 충효의 가훈이 있다. 겸양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인내하며, 문제가 있다면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이며, 덕으로 사람을 품으라는 가르침이다. 이에 옥천조씨 23세손 부정공파 종회 유사 조용훈(70세)씨는 '선조의 가훈에 따라 옥천 조씨 집안에서는 우리 역사에서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특히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충을 다했으며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선비정신을 실천했던 가문이었다.'고 한다. 옥천조씨 일문은 앞에 거론되었던 여말선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충을 다했던 인물들 말고도 근·현대 들어서도 조경환 등 독립운동가로, 조규한 등 의병장으로, 또 정계와 학계, 재계 등에서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했다.

남도의 산들은 허리춤부터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다. 마치 산이 안개 모자를 쓰고 너른 들에 누워 있는 것 같다. 호남고속도로 주암 IC로 빠져나와 보성강과 나란히 달려 겸천다리를 건너는 서원 가는 길을 이제 되짚어서 나오고 있다. 서원 앞 배롱나무가 이곳 죽림리가 충절과 의리의 고장임을 얘기해 주는 듯하다. 붉고 흰 꽃들을 피운 배롱나무, 그 수피가 노인의 등뼈처럼 누렇게 말라붙어 무욕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그 수피가, 내게는 목숨을 걸고 충과 의를 지키는 선비정신의 고결한 표피 같은 것이 아닐까, 서원을 나오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절은 처서에서 백로로 가는 때. 천지에 기운이 소슬하다. 가을은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온다더니, 땅에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 가득하고, 가을은 뭉게구름 타고 온다더니 하늘엔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모습이 아름답다. 여름과 가을이 교대하기 위해 만나는 곳, 계절의 순행이 이 즈음처럼 엄연한 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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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천서원에는 조유, 조사문, 조숭문, 조철산 등 옥천조씨(玉川趙氏) 4인과 순천을 관향으로 한 김종서, 박중림, 박팽년 등 세 가문의 일곱 충신이 배향되어 있다.

조유(趙瑜 1346~1428)는 지금의 순천 주암의 입향조로 절의와 효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고려 말 진사로 문과에 급제해 중현대부 전농시부정에 이르렀으나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여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그가 죽은 뒤 세종(세종)이 예관을 보내 장사 지내고 <효자전부정조유지여>라는 정려를 내리고, 어제시(御製詩) 18구를 직접 내려 보내기도 했으며 하사한 정려는 상호정 담장 안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박중림(朴仲林, ?~1456). 본관은 순천 호는 한석당(閑碩堂)으로 1423년 식년문과에, 1427년 문과중시에 급제했고, 세종 때 집헌전 학자, 공조참판. 이조판서를 지냈다. 1456년 아들 팽년과 함께 단종을 복위하려다 사형되었다.

김종서(金宗瑞, 1390~1453). 세종과 단종 때의 재상이자 6진을 개척한 명장으로 자는 국경(國卿)이고 호는 절재(節齋)이며 본관은 순천이다. 1405년(태종 5년)문과에 급제 1451년 우의정에 오르고, 1452년 세종실록의 총재관을 거쳐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하였으며 단종 즉위 후 어린 왕을 보위하다 1453년에 수양대군에게 피살당했으며 1746년(영조 22)에 복관(復官) 충익(忠翼)의 시호 받았다.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조선의 문신 겸 학자로 조선조 세조(世祖) 때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던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본관은 순천이다. 1434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집현전에 들어가 학문을 닦고 고제(古制)를 연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손자 박일산이 생존하여 사육신 중 하위지 가家와 함께 후손이 전한다.

조사문(趙斯文, 1398~1483). 자는 도종이고 호는 삼성이며 본관은 전부정공 조유의 첫째 아들이다. 세조 때 벼슬은 수위부위좌군사정을 지냈다. 손자 침(琛)의 추은으로 통정대부이조참의 겸 경영참찬관에 추증되었고 1456년(세조 병자년)에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동생 절민공 부자는 앞에 화를 당하고 참의공은 뒤에 전주에서 처형당하고 시체는 마근대미산에 묻혔다고 하나 실전되어 유의장 하였고 1996년 가을에 유림들의 발의로 겸천서원에 추배되었다.

조숭문(趙崇文, ?~1456).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옥천(玉川). 자는 무백(武伯). 호는 죽촌(竹村). 부정 유 둘째 아들이며 세조 때 사육신 성삼문의 고모부이기도 하였다. 세종 때에 무과에 급제하고, 1456년(세조 2) 병마절도사 재직 중에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아들 철산(哲山)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1779년(정조 3) 경연관 송덕상의 상계에 의하여 구기(舊基)인 주암면 죽림리에 정려가 건립되고, 1791년에 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동학사 내에 건립된 숙모전(肅慕殿)에도 배향되었으며, 뒤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절민(節愍)이다. 조철산(趙哲山, ?~1456). 조숭문의 아들로서, 자는 진경(鎭卿), 호는 귀천(龜川)이다. 1455년(세조 1) 단종 복위운동을 벌였으나 밀고되어 고신(告身)을 환수당하고 원지에 유배되어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정조 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고, 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1.죽림마을 앞에서 바라본 상호정. 영모재. 서원 전경(사진 백옥연)

2.겸천에서 바라본 겸천서원 상호정 전경(사진 백옥연)

3.양문을 들어서서 좌측에는 첨모문이, 우측에는 영모문이 있고 첨모문 들어가면 상호정이 있고 영모문 들어가면 영모재가 그리고 직진하면 겸천서원이 있다. (사진 백옥연).

4.겸천서원 중건 기적비.(사진 백옥연)

5.겸천서원 강당.(사진 백옥연)

6.겸천서원 사당 겸천사 삼문칠충이 배향되어 있다(사진 백옥연)

7.전부정공조유지여 정려(사진 백옥연)

7-1.세종이 내려준 조유의 전부전공조유지여 정려. 배롱나무 꽃이 피어있다.(사진 백옥연)

8. 상호정 정면 참의공 조사문 선생의 네 아들이 서로 우애하며 공부하고 지내던 곳(사진 백옥연)

8-2.상호정 편액(사진 백옥연)

9.죽림마을 앞 들녘, 멀리 조계산이 보인다.(사진 백옥연)

상호정을 건립한 참의공 조사문의 네 아들을 뜻한다는 기둥

정려 옆 선비의 고결한 상징 충과 의 배롱나무 지다. (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