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연의 문향, 가다가 멈추는 곳〉-나주 영모정(永慕亭), 백호문학관-부조리한 세상을 조롱했던 영원한 자유인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백옥연의 문향
백옥연의 문향, 가다가 멈추는 곳〉-나주 영모정(永慕亭), 백호문학관-부조리한 세상을 조롱했던 영원한 자유인
  • 입력 : 2020. 10.29(목) 13:45
  • 편집에디터

0.영모정 앞 영산포나루로 향하는 황포돛배 사진 백옥연

열다섯 아리따운 처녀 시냇가에서 (十五越溪女)

부끄러워 말없이 이별하네 (羞人無語別)

돌아와 겹문을 닫아걸고 (歸來掩重門)

배꽃 같은 달을 보며 눈물짓네 (泣向梨花月)

- 무어별(無語別), 임제

임제의 무어별은 시중유화(詩中有畵)다. 임과 이별하는 열다섯 처녀의 애틋한 마음이 네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다. '월녀(越女)'는 중국 남쪽 절강성에 사는 여인들로 미녀를 이르는 말이다. 이별의 장소 시내는 마을 안팎을 구분 짓고 있다. 말 한마디 건네 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중문을 닫아건다. 사랑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내 마음을 알아줄 이는 하늘의 달 밖에 없다. 배꽃 같은 달에 임의 얼굴이 어리고, 안타까운 내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잘 묘사한 이 시는 허균의 『학산초담(鶴山樵談)』에 규원시(閨怨詩)로 소개되었다. 현대에는 연극으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 나주 태생으로 조선 중기 시인이자 문신이다. 제주목사를 지낸 임진의 5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임제는 6살 때부터 10년간 외가인 곡성에서 살았다. 학자 김흠을 스승으로 글을 배웠고 16세에 나주로 돌아온다. 부친은 무과에 급제한 전형적인 무인으로 후일 백호가 문인이면서 때로 무술을 익혔던 것은 그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세속의 학문에 적응하지 못한 백호는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했다. 1570년 그의 나이 22세 겨울, 상경 길에 쓴 시가 대곡 성운(成運)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사사했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속리산 종곡에 은거하면서 토정 이지함,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등 많은 학자들을 가르친 큰 스승이었다. 격정적이고 거친 제자에게 스승은 '중용(中庸)'을 1,000번 읽으라 했고 백호는 속리산 법주사 주은암에서 800번 읽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6년에 걸린 공부 끝에 그가 남긴 시 한수.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지만 속세가 산을 떠나네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28세인 1576년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과거에 응시, 생원 진사에 합격했다. 이듬해 대과에 급제해 어사화 두 송이와 거문고, 칼 한 자루를 들고 호총마를 타고 제주목사인 아버지에게 근친을 갔다. 3개월간 제주를 둘러보고 <남명소사>라는 기행 글을 남겼다. 흥양현감, 서북도 병마평사, 관서 도사,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당시 조정은 을해년 분당으로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심화되고 있었다.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했던 그는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사라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고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

조선의 3대 천재 시인이자 로맨티스트였던 임제는 기생과의 숱한 일화를 남겼다. 35세에 서북도 병마평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를 지낸 일화는 유명하다. 양반 신분에 기생의 무덤 앞에서 예를 갖추었으니 조정의 비난이 빗발쳤다.

가장 널리 회자되는 것은 평양기생 한우(寒雨)와의 사랑이다. '찬비'라는 그녀의 이름에 빗대 백호가 시조 한 수를 노래한다. 찬비를 맞았으니 얼어 잘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해학이다. 명기 한우가 그냥 있을 리 없다. 즉석에서 시조로 답한다.

'북천(北天)이 맑다거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느니 얼어 잘까 하노라' (임제)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한우)

찬비를 맞았으면 따뜻하게 녹아 자야지, 원앙을 수놓은 베개와 비취빛 이불은 어디 두고 얼어 잔다는 말인가. 운우지정이 무르익고 있는 장면이다.

임제는 관직에 뜻을 잃고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나주 회진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향년 39세. 서른아홉 젊은 나이로 죽기 전 네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사해제국 오랑캐들이 다 스스로를 황제라 일컫는데 오직 우리 조선은 중국을 섬기는 나라이다. 이런 욕된 나라에서 살면 무엇을 할 것이며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마라'는 '물곡사(勿哭辭)'가 유명하다. 자주성을 회복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아 세계를 호령하기를 바라는 호방한 유언에 대해 사학자 호암 문일평은 '위대한 임종'이라고 했다.

관리가 되어 큰 포부를 펼치려던 백호의 기개는 단단한 현실 앞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의 울분은 붓에 실렸고, 붓은 칼끝이 되어 부조리한 사회를 조롱하고 비판했다. 함축성 있고 자유분방한 표현수법, 그리고 풍부한 서정과 예술성으로 시대를 관통했다. 백호는 1천수가 넘는 방대한 시를 남겼으며 문집으로 '임백호집' 4권이 있다. 사육신의 혼령을 불러내 당대 간신들을 비판한 소설 '원생몽유록', 사물을 사람에 빗대어 현실의 불만을 표출한 '수성지', 꽃을 사람에 비유해 당쟁과 부정을 풍자하고 이상사회 건설을 염원한 '화사' 등의 한문소설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그의 시대의식이 투영된 작품들로 고전소설의 백미로 꼽힌다.

구진포에서 영산강변 도로를 따라 회진마을 못미처 오른쪽 언덕에 영모정이 자리잡고 있다. 귀래정 임붕(林鵬)이 건립한 정자로 초기에는 귀래정이라 불렀으나 두 아들 임복과 임진(임제의 아버지)이 다시 지으면서 영모정이라 하였다. 앞에는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며 주위에 400여년이 된 팽나무가 둘러있다. 이곳은 임제가 글을 짓고 문사들과 교유했던 곳으로 아래에는 '귀래정나주임공붕유허비', '백호임제선생기념비', '물곡사비'가 있으며 회진마을에는 '백호문학관'이 있다.

16세기 조선이 배출한 호남의 위대한 문학가 백호 임제. 그의 붓은 부드러웠으되 비판은 추상 같았던 학자이자 시인이었고,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에 분노한 계몽 사상가였으며,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자유인이었다.

'우주 간에 늠름한 육척의 사나이,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백호문학관에 걸린 「이 사람(有人)」 한 줄의 시가 호방한 기질로 예속되지 않는 임제의 정신을 관통하고 있다.

0-1영모정 앞 영산강 풍경_사진 백옥연

0-2.영모정 앞 영산강변 억새가 햇빛에 출렁인다.사진 백옥연

1.영모정 전경. 조선 전기의 건물로 주위에 400여 년 된 팽나무가 둘러있어 주변 경관이 아름다우며 정자로서의 건축적 규범을 보여주고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2.영모정 전경. 조선 전기의 건물로 주위에 400여 년 된 팽나무가 둘러있어 주변 경관이 아름다우며 정자로서의 건축적 규범을 보여주고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백옥연

3.영모정(전라남도 기념물 제112호) 조선 전기의 건물로 주위에 400여 년 된 팽나무가 둘러 있어 주변 경관이 아름다우며 정자로서의 건축적 규범을 보여주고 있다.사진 백옥연

4.영모정 주변에 400여 년 된 팽나무들이 울창하다.사진 백옥연

5.경관이 아름다운 영모정 사진 백옥연

6.영모정_사진 백옥연

7.영모정3 사진 백옥연

8.백호문학관.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백호문학관. 임제가 어릴 때 공부하던 '석림정사' 친필현판, 제주도 여행기 '남명소승' 친필 미공개 시편 등 그의 작품과 지역우림들이 임제 서원 건립을 요청하는 건원상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백옥연

9.백호문학관_사진 백옥연

10.백호임선생 임종계자물곡사비. 자립하지 못한 조선에 태어나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며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담은 물곡사비가 영모정 나주임씨대종회종무소 앞에 있다.JPG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