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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1>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② 석굴암 본존불과 운주사 못난이 돌부처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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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1>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② 석굴암 본존불과 운주사 못난이 돌부처의 만남

게재 2020-06-04 12:34:51

1. 운주사
1. 운주사 "가" 석불군 전경(사진 운영녀)

신라 경대왕대의 중국 모방정책

우리는 석굴암의 본존불 앞에 서면 인류 최고의 조각예술품으로 감탄에 감탄을 더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경덕왕대의 사회상이 떠올라 찜찜해진다. 그 당시 경덕왕은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탓에 주변 신하들이 왕 흔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여기에 불안을 느낀 왕이 중국의 위세(威勢)를 동원하려 한 것이 이른바 漢化政策인 것이다. 토착적인 관직의 명칭이나 주·군·현의 지명을 우아한-말에 폐단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 당시 지식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한자 어휘나 중국식으로 바꾼다든지 하는 중국 모방 정책 속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이 이루어졌다. 요사이 걸핏하면 미국의 힘을 동원하려는 정치인들이나 미국말 하나 지껄이지 못하면 병신 축에 들게 만들어버린 美化政策(미국모방정책)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석굴암 본존상은 중국 당나라 현장 스님의 '大唐西域記'에 묘사된 인도 부다가야(보드가야)의 마하보리사(大覺寺)의 성도상을 모방한 것이라는 강우방 선생의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중국을 닮아가려고 얼마나 몸살을 쳤는지 눈을 감아도 한눈에 훤하다.

신라 경대왕대 유·불교계의 충효논쟁

당시는 경덕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충과 효를 하나로 강조하는 분위기를 띄우려고 충담사에게 안민가를 지어달라고 한다. 안민가는 君?臣?民을 하나의 가정(家庭)으로 보고 군과 신은 부부관계로 서로 협력해야 하며 민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으로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의 일방적인 노력만 강조하는 안민가는 그 후 충담사를 왕사로 임명하려고 했었다는 경덕왕의 태도로 미루어 전제 왕권 강화책을 만족시켜주는 충실한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다.

이처럼 전제 왕권 강화를 위해 경덕왕이 불교계와 밀착하여 충효를 강조하는 분위기로 몰아가려 하자 유학자들은 불교도의 출가를 효도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발끈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여기에 대해 불교계 출가자들은 진정 법사의 예를 들며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홀어머니를 두고 출가할 수 없는 현실을 고민하는 진정 법사에게 살아생전에 고량진미를 대접받기 위해 자식 출가를 막는 것은 어머니 자신이 지옥에 빠질 일이라고 자식의 출가를 강요하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효도에 대한 진면목을 보여줄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러한 관점에서 누구나 보고 인정할 수 있는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과 같은 상징적인 조형물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김주성 교수의 탁견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김대성 같은 이는 현생 부모의 장수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 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해 석굴암을 창건하였으며 연기조사 같은 이는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화엄사에 '4사자 삼층석탑' 같은 독특한 효 상징물을 건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듯 유학자들의 효에 대한 이의 제기와 여기에 대한 불교계의 대처를 떠올리다 보니 경덕왕의 전제 왕건 강화의 입김 속에서 조각된 석굴암 본존불에서는 다분히 속인들은 감히 범접지 못할 위압감에 주눅마저 든다. 거기에 비교하면 이웃집 아저씨 같은 운주사 못난이 돌부처는 얼마나 편안한가? 석굴암 본존불에서는 가슴을 치며 태생적 한계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촌로들도 못난이 돌부처 앞에 서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벅차오른다. 귀족 불교미술의 정수인 석굴암 본존불과 민중 불교미술을 웅변한 운주사 못난이 돌부처는 우리 미혹한 중생들이 애써 구분 지어 놓은 부처님일 뿐 부처님 자신들은 아무런 섭섭한 감정이 없단다. 부처님은 중생의 요청(根氣)에 따라 여러 모습(方便)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낸 것뿐이리라. 하지만 그러한 부처를 만든 이들은 기득권을 절대 내놓으려 하거나 원한을 삭히려 들지도 않는다.

석굴암은 왕권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정치적 기반이 불안하고 즉위한 지 15년이 다 되어서도 왕위를 이을 아들마저 없는 경덕왕을 위해 신라 귀족 김대성이 만들어 바친 득남을 기원하는(祈子) 기도처로 일반 사찰과는 가람 구조부터가 다르다.

못난이 돌부처를 보고 울분을 삭이는 사람들

운주사의 불적은 많은 탑과 불상이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흔히 경주의 南山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운주사의 불상과 탑은 경주 남산처럼 여러 골짜기에 별개의 불사로 나뉘지 않아서 태생적으로 다르다. 100여 분의 돌부처와 30여 기의 석탑들이 골짜기 여기저기에 우뚝하거나 넘어져 있어 마치 석불과 석탑의 야외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한국 불교미술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희한하고 불가사의한 유적이다. 굳이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새벽에 닭이 울어 공사를 중단했다'라는 도선의 설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운주사는 미완의 도량으로서 영원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석굴암 본존불에 익숙한 눈으로 운주사의 석탑과 석불을 들여다보면 한결같이 못생기고 볼품도 없다. 돌부처의 눈·코·입의 생김새는 물론 형체비례도 어색하여 부처의 위엄이라고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다. 석탑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석 기단과 특이한 장식 무늬, 원반형이나 뚝배기 같은 옥개석의 석탑은 물론 판석을 다듬지 않고 깨진 그대로 옥개석으로 얹은 돌탑에 가서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다. 이처럼 정형이 깨진 파격미, 힘이 실린 도전적 단순미, 친근하면서도 우습게만 느껴지는 토속적 해학미, 또 그것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집단적으로 배치된 점이 운주사 불적의 신선한 감명이며 특이한 마력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왠지 역사적으로 소외되어왔다고 여기는 자신들의 모습과 운주사 '못난이 돌부처'와 '동냥치 탑'을 동일시하는 정서가 물씬 풍긴다. 특히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치른 후 방황하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황량한 운주사 골짜기에서 울분을 삭이기도 하였다. 목이 떨어졌거나 머리만 돌아다니는 돌부처의 모습에서 참담함을 느끼고 와불이 일으켜 세워졌으면 이 땅이 수도가 되었을 것이라는 참언에 가서는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였다. 흔히들 불교에서의 천불신앙은 참회 신앙이라 하는데 무엇을 참회하기 위해서, 아니면 참회시키기 위해 이곳에 천불천탑을 조성하려고 하였는지 우리는 무척 궁금하다.

운주사를 기록한 문헌과 발굴유물

운주사가 등장하는 가장 오랜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의 기록(雲住寺 在千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 : 운주사,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등성이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일천 개이다. 또 석실이 있는데 두 석불이 서로 등지고 앉았다.)이다. 이후 각종 지리지나 읍지류 등에 단편적인 내용만 전해지는데 이들은 모두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그대로 베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하지만 '동국여지지'(1656년)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에다가 비록 '諺傳'(俗傳)이지만 신라 때의 사찰 창건과 고려 승려 혜명에 의해 천불천탑이 조성되었다는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雲住寺 在千佛山西 寺舊廢 其左右崖壑 石佛石塔 大小甚衆 謂之 千佛千塔 又有一石室 其中二石佛 隔壁相背坐 諺傳 新羅時所造 或謂 高麗僧惠明 有徒衆數千 各令造成云: 운주사, 천불산 서쪽에 있다. 절은 오래전에 폐허가 되었다. 그 좌우 벼랑과 기슭에 크고 작은 석불과 석탑이 매우 많이 있어 이를 일러 천불천탑이라 한다. 또 석실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두 석불이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지고 앉았다. 언전에 의하면 (절은) 신라 때 조성된 것이라 한다. 혹 일컫기를 고려 승려 혜명이 수천 명의 무리들을 데리고 각각 명령해서 조성했다고도 한다.)

유물로는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암키와의 명문에 운주사를 표현하고 있다.(雲住寺丸恩天造) 구름이 머물다가 쉬어 가는 절 운주사는 세파에 찌든 이들의 훌륭한 피난처인 셈이다.

학계의 연구 현황

학술적인 접근으로는 1941년에 고유섭에 의해 밀교적 의미로 파악된 이래 건축적 성격을 밝히려는 일제강점기의 일본 학자들의 접근뿐만 아니라 유적의 현황이나 성격 규명을 위한 노력 등도 이루어져 왔다. 더욱 본격적인 연구로는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조사연구로 사찰의 이름, 절터의 크기, 건물터의 위치와 중창 과정, 초창의 시기 등에 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운주사는 여전히 통일신라 말의 도참승 도선이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쌓았다는 불가사의한 전설 속에 가려진 신비스러운 유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사찰의 초창기를 이해하는 과정에서도 전설처럼 도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에서부터 고려 초기나 12세기, 11세기 초반을 상한으로 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또 그 창건의 주체에 대해서도 통일신라 말에 능주 지방의 호족 세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하고 전설대로 도선국사에 의해 비보 사찰로 건립되었으리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는 조금 늦게 능주 지방에 이주해 온 이민족 집단에 의해 개창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나왔다. 게다가 미륵의 혁명 사상을 믿는 천민들과 노비들이 들어와 천불천탑과 사찰을 만들어 미륵공동체 사회를 열어 놓았던 것으로 추정하는 이색적인 주장, 심지어는 와불이 일어서면 이 지역이 백제의 한을 이은 한반도의 수도가 된다는 기막힌 주장까지도 발표되었다.

더욱이 운주사의 성격에 대해서조차 불교 사원이라기보다는 도교 사원이었다는 주장, 밀교 사원이었다는 주장, 민간 신앙의 기복처라는 주장도 제시되었다. 또 운주사 골짜기는 불교 사원의 경내이기보다는 천민과 노비들의 해방 구역(코뮌)이 되는 곳으로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중세시대 노예의 자유민 자치 구역의 역사적 유적지라는 주장, 몽골이 침입할 때 군사로 끌려온 거란족들이 전란 후 성씨를 나라에서 내려 이 땅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였다고 하며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소망을 담은 것이 운주사 천불천탑이라는 주장까지도 등장하여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운주사에 대한 신앙적인 접근으로는 우선 1984년의 발굴조사 보고서에서 천불신앙과 밀교 계통 사원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운주사의 불상 불탑이 과거 현재 미래의 三世 삼천불 중 현재의 현겁 천불에 대한 신앙인 천불신앙에 의거 조성되었다고 보거나, 옴마니반메훔은 진언밀교에서 외우는 육자대명주이고 석불의 합장인이 밀교와 관계가 있는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을 도식화한 것으로 밀교 계통의 사원이라는 각기 다른 주장이 함께 수록되었다. 인근 쌍봉사에 주석한 만전(뒷날 최항)이 몽골 침략을 물리칠 영구적인 石造 百高道場을 베풀려고 하였다는 주장도 등장하였다.

2. 운주사 못난이 돌부처(사진 염동석)
2. 운주사 못난이 돌부처(사진 염동석)
3. 석굴암 본존불(사진 안장현)
3. 석굴암 본존불(사진 안장현)
4. 운주사
4. 운주사 "가" 석불군 주존불(사진 황호균)
5. 운주사
5. 운주사 "가" 석불군 협시보살(사진 황호균)
6. 운주사
6. 운주사 "나" 석불군 전경(사진 황호균)
7. 운주사
7. 운주사 "바" 석불군 협시보살(사진 황호균)
8. 운주사
8. 운주사 "가" 석불군 협시보살(사진 황호균)
9. 운주사
9. 운주사 "가" 석불군 협시보살(사진 황호균)
10. 운주사
10. 운주사 "가" 석불군 협시보살(사진 황호균)
11. 운주사
11. 운주사 "나" 석불군 협시보살(사진 황호균)
12. 운주사
12. 운주사 "나" 석불군 협시보살(사진 황호균)
13. 운주사
13. 운주사 "나" 석불군 협시보살(사진 황호균)
14. 운주사
14. 운주사 "라" 석불군 협시보살(사진 황호균)
15. 운주사 동냥치탑(사진 황호균)
15. 운주사 동냥치탑(사진 황호균)
16.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16.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16.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16.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17. '동국여지지'(1656년)
17. '동국여지지'(1656년)
17. '동국여지지'(1656년)
17. '동국여지지'(1656년)
18. 운주사 석조불감 및 남북 쌍탑(사진 박하선)
18. 운주사 석조불감 및 남북 쌍탑(사진 박하선)
19. 운주사
19. 운주사 "바" 석불군 근경(사진 박하선)
20.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4년 촬영)
20.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4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