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박성열>역사 속 한반도 분단의 위기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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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박성열>역사 속 한반도 분단의 위기와 교훈
박성열-숭실대 평화통일연구원 교수
  • 입력 : 2020. 06.24(수) 13:00
  • 편집에디터
박성열 교수
한국전쟁(6·25) 발발 70주년을 맞는다.

6·25는 남북한만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유엔군과 소련·중국이 각각 남북한 편에 선 동북아 국제전쟁으로서 2차 대전 이후 형성된 냉전질서가 확고하게 굳어지고 남북한 분단이 공고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의 교차점이자 완충지로서 역사속에서 강대국들의 전략적 목표가 되어 수차례 분단의 위기에 직면했다.

1592년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했다.

무력했던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참전한 명나라가 개입하여 일본군을 한반도 남쪽으로 몰아냈다. 이에 일본은 1593년 6월 일본이 한반도 남부 4개도를 점령하고 명나라가 북부 4개도를 점령하는 분할안을 제시했다.

군사적 우위를 확신한 명나라와 조선 반대로 무산되었고, 1598년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철수하였다.

조선말기 한반도에 물밀 듯이 들어온 강대국들간 조선 분할안이 다시 대두됐다. 1894년 7월 영국 외상 킴벌리는 동학운동 진압 명분으로 한반도에 진주해있는 청나라와 일본군 충돌을 막기 위해 양측에 북한과 남한지역을 각각 점령하도록 제의했다.

청나라는 서울 포함 조건으로 수락했으나, 일본이 거부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에서 이긴 일본이 시모노세끼 조약(1895년)으로 요동반도, 대만을 청나라로부터 할양받고,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배제했다.

1903년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다투던 러시아와 일본은 북위 39도선 기준 한반도 분할안을 놓고 협상을 벌였다.

러시아가 한반도 북위 39도 이북은 어느 나라 군대도 주둔하지 않은 완충지대화하고 39도 이남은 일본 지배를 인정하는 제안을 했으나, 영일동맹을 등에 업은 일본이 거부하였다.

결국, 일본은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확립하였다.(1905년 한일보호조약)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1945.8.15.)한 후, 미국과 소련이 각각 남북한에 진주해 38도선 경계로 분할 점령하고,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분단이 시작됐다.

2차대전 이후 분단된 나라들중 남북한은 동족상잔의 전쟁(1950-1953)을 거쳐 유일하게 아직도 분단 상태로 남아있다.

돌이켜보면, 역사에서 한반도의 분단 위기는 강대국 이해관계와 세력다툼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면서, 이에 대응할 내부 역량이 변수로 작용했다.

국력이 바닥난 조선은 강대국의 분단 지배논의에서 무력했고, 이는 결국 강대국의 배타적 독점 지배나 분할 점령으로 나타났다.

2020년 지금의 한반도 상황은 과연 어떠한가? 미국과 중국간 전방위적 패권경쟁이 상시적으로 전개되고 있고, 일본의 국수주의·러시아의 팽창주의가 점차 노골화되고 있다. 북한은 핵을 담보로 생존을 모색하면서 남한을 압박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과거 조선과 달리 세계 중견국이 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힘을 결집하지 못하고 분열되면 위기에 처할 수 있다. 평화를 지키면서 주변국 및 북한과 갈등을 조율해나가는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