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순남 수필가 |
"선배한테 배워서요, 지는 편이 우리 편이라고요. 나한테는 선배가 내편이고, 신념이고, 세상이었는데…." 얼마 전에 종영한 모 tv드라마 '화양연화'(전희영 극본, 손정현 연출)에서 지수(이보영 분)가 대학 선배 재현(유지태 분)에게 한 말이다. 데모나 사회문제에 관심 없던 부잣집 여대생 지수는 가난한 운동권선배 재현을 만나 삶의 가치관을 바꾸게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운명은 그들을 갈라놓았고, 십여 년 후 지수는 혼자서 피아노레슨으로 아들을 키우는 힘든 상황에 봉착한다. 그래도 가슴에는 재현에 대한 그리움을 별처럼 담고서 회사와 투쟁하는 비정규직들을 도우며 꿋꿋하게 살아간다.
한편 재현은 변절하여 재벌 사위가 되어있었는데, 그들은 십여 년 후 정 반대의 입장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다. 재현은 자기회사를 상대로 데모하는 직원들을 돕는 지수에게 "너의 신념은 이제 세상에 없다"라고 한다. 지수의 신념이었던 재현은 변했지만, 지수의 가슴에 있는 그는 신념 그대로였다. "이겨본 적은 없지만 부끄러운 적은 없었는데,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선배 때문에 그걸 바꾸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로 재현의 폐부를 찌른다. 결국 재현은 자기의 '마지막 양심이 있었던 자리'에 가서 마음을 다잡는다.
화양연화의 명대사 "만날 사람은 어떻게 해도 결국 다시 만나게 된다."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사랑이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상대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 그 드라마는 다행히 다시 만나 정 반대의 가치관을 사랑의 힘으로 돌려놓으면서 해피엔딩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만나도 그런 저런 이유로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별처럼 가슴에 안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인생길을 가다보면 꽃을 보는 날도 있고, 먹구름을 보는 날도 있다. 다른 길로 갔으면 비바람을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후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가슴에 아쉽고 그리운 별 하나쯤은 안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바람을 맞아보지 않고 그저 꽃이 만발한 길만 걸은 사람은 비바람의 낭만(?)을 모른 채 꽃향기의 독에 취해 나태해져서 진주를 만들지 못하는 조개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개 속에 작은 모래 한 알이 들어가면 조개는 조갯살의 상처를 막기 위해 점액을 분비해서 모래알을 겹겹이 감싸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잘못 들어온 이물질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값진 진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연애나 결혼에서 선택하지 않았던 상대에 대한 그리움, 특히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픔은 문학작품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또 삶속의 여러 가지 일에 대한 기로에서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도 그리움으로 남는다. 헤어진 사람은 헤어 진대로 추억 속에 별처럼 남아있고, 가지 않은 길도 아쉬움으로 남아서 별이 된다. 그 별들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이나 달을 보면서, 하염없이 내리는 비나 눈을 맞으며, 혹은 정처 없이 흐르는 강물이나 빈 허공을 보면서 문득문득 가슴에 어리어 상상의 세계로 피어난다. 그 상상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다시 아름다운 삶을 엮을 수 있는 힘으로 되살아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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