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택배 없는 날'… "28년 만에 첫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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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오늘은 '택배 없는 날'… "28년 만에 첫 휴가"
올해 7명 과로사…택배산업 사상 첫 휴무 선언 의미 ||무늬만 사장 택배 노동자… “법적 보호·빨간 날 없다”
  • 입력 : 2020. 08.13(목) 18:57
  • 김진영 기자
택배 노동자 전주안씨가 13일 광주시 광산구 한 아파트에서 택배를 꺼내고 있다. 전씨는 하루 350여개 물량을 쉼없이 날라야 7시 무렵 퇴근 할 수 있다.
14일은 택배 없는 날이다. 국내 택배 산업이 시작된 지 28년 만에 최초로 시행된다.

민주노총 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전국택배노조와 한국통합물류협회가 택배기사들의 '휴식권 보장'에 합의하면서 택배 노동자들에게 16일까지 사흘간 연휴를 보장하기로 했다.

택배 노동자들은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못함에 따라 법정 휴일, 연차, 휴가 제도를 적용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주 5일제도 요원한 현실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소비' 증가로 택배사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택배사 대리점과 도급·위탁 등의 계약관계를 맺어 노동시간의 제한 없이 일하는 택배 노동자들은 올해 상반기에만 벌써 7명이 과로로 숨졌다.

하루 14시간 노동… "빨간 날 없다"

지난 5월 4일 광주 광산구 한 아파트에 사는 41살 정모씨가 잠을 자던 도중 '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비명은 그대로 유언이 됐다. 정씨는 CJ대한통운 한 대리점에서 7년간 일해온 택배 노동자다.

그는 올해 여느 때보다도 숨 가쁘게 뛰었다. 길게는 하루 14시간씩 달려야 했다. 코로나19로 물류량이 급증한 탓이다. 평소에도 500개가 넘는 물량을 소화해왔는데 코로나19 이후 석 달 동안 800개가 넘는 물량을 처리해야만 했다. 매일 새벽 6시에서 6시 반에 출근해 이르면 저녁 8시, 늦으면 저녁 9시를 넘기는 날도 허다했다.

주당 노동 시간으로 환산하면 78시간에서 90시간, 근로기준법상 법정 노동 시간인 주 52시간을 크게 초과하는 수치다.

비단 정씨만의 일이 아니다. 11년째 CJ대한통운에서 택배 일을 하고 있는 전주안(46)씨는 정씨의 죽음이 "남 일 같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죽은 정씨는 그와 함께 일하던 친한 동생이었다.

그 역시 11년째 한 번도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택배 노동자들은 토요일에도 쉬지 않는다. 일요일과 공휴일, 문자 그대로 '빨간 날'만 쉰다. 주말도 피로로 완전히 녹초가 돼 잠만 자기 일쑤다.

"하루 평균 350개 정도 배송하는데 일단 배송을 시작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돌려야 간신히 오후 7시에 퇴근할 수 있어요. 근로기준법 보호도 못 받죠. 저희는 개인 사업자니까요." 전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늬만 사장' 택배기사는 파리 목숨

택배 노동자들은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다. 이른바 특수 고용직 노동자다.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법정 근로 시간을 초과해서 일해도 법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이들은 중간 단계인 대리점과 배송 계약을 맺고, 이 대리점이 CJ 대한통운 같은 택배회사들과 다시 계약을 맺는 이중 구조다.

실상은 택배회사에 소속돼 직원처럼 근무하지만 '무늬만 사장님'인 탓에 원청인 택배 회사들은 택배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관리 책임을 갖지 않는다. 과로로 세상을 떠나도 누구도 이들의 죽음을 책임지지 않는다.

전 씨는 이런 관계를 '절대적인 을'이라고 표현했다.

"회사에서 그만두라고 말하면 끝인 거예요. 택배 노동자는 개인 사업자니까요. 4대 보험 보호도 못 받아요. 그나마 산업재해 보험은 대리점주와 택배기사가 반반씩 부담해서 가입할 수 있지만, 어떤 곳은 이마저도 아까워서 반강제적으로 적용을 제외해달라고 권유하기도 해요."

고객들과 관계에서도 택배 노동자들은 '절대적인 을'이다. 물건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모든 책임은 고스란히 택배 기사 몫이다. 폭언과 욕설을 달고 다닌다. 무거운 쌀, 생수 등을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주택까지 배송해 남는 돈은 800원 남짓. 그래서 경력이 좀 있는 택배 노동자들은 늘 허리 통증에 시달린다.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으니 약 먹고 참으면서 일하는 신세죠. 연세가 있는 분들은 버티질 못해요."

'14일 택배 없는 날' 11년 만 첫 휴가

14일 전씨를 비롯한 택배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공식 휴가를 떠난다. 전씨는 2박3일 일정으로 캠핑을 떠날 예정이다. "하루라도 맘 편하게 쉴 수 있는 날이 있으면 좋겠다"는 그의 소망이 마침내 이뤄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음날부터 쌓일 물량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휴가를 다녀오면 물량이 밀려 업무강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다.

게다가 '택배 없는 날'에 쉬지 못하는 택배 노동자도 있다. 전씨는 "택배 없는 날이 정례화돼 더 많은 이들이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말한다.

또 "택배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개선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택배 노동자들의 최소화의 법적 보호를 위한 '생활물류서비스산업 발전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며 "반짝 휴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과로사를 막기 위한 노동 환경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진영 기자 jinyo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