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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유일 왜성, 순천왜성…임란 최후 육상전투 벌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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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유일 왜성, 순천왜성…임란 최후 육상전투 벌어져

정유재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축성
왜군, 호남 공격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
호남공략의 거점, 순천에 주력군 진지 구축
조명 연합군 바다서 육지서 순천왜성 공격
임란 최후 해상전투 노량해전서 이순신 순국

게재 2020-09-22 16:25:17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 순천왜성(倭城)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쌓은 성이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 순천왜성(倭城)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쌓은 성이다.
명나라 종군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
명나라 종군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
순천왜성 천수각 기단
순천왜성 천수각 기단
순천외성 문지(門址)
순천외성 문지(門址)

순천에 왜성을 쌓다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정유재란 당시 쌓은 왜성(倭城)이 있다. 순천왜성(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이 그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일본군의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쌓은 성이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육지부를 파내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고 다리를 놓아 낮에는 다리로 사용하고, 밤이면 다리를 끌어들였다. 그래서 조·명 연합군은 이 성을 왜교(倭橋), 왜교성(倭橋城) 또는 예교(曳橋)라 부르기도 했다. 일본군은 왜 순천에 왜성을 건립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 1만 3천의 주력군을 주둔시켰을까?

명군과 왜군 사이에 지루하게 이어지던 강화 협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리한 요구로 결렬된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제2차 조선 침략을 명한다. 정유재란이다. 일본군 총대장 고바야카와 히데야키(小早川秀秋)는 좌·우 2개 군과 수군을 편성,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이를 지휘하게 했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좌군은 남원을 함락시킨 후 전주에 입성하였고, 모리 히데모토의 우군도 함양의 황석산성을 함락시킨 후 전주에 들어온다.

전라도 진출에 성공한 왜군은, 좌·우군으로 편성 후 우군은 충청도로 진출하고 좌군은 전라도를 장악하기로 역할을 분담한다. 하지만 북상하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휘하의 왜군은 9월 초 직산 전투에서 명군에게 패배한다. 패배한 왜군은 9월 중순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남하하여 분산 주둔하면서 지역의 요충지를 택해 성을 쌓는다. 이때 축성된 왜성 중 하나가 순천왜성이다. 순천왜성의 축성은 본국과 가까운 지역, 병참보급선이 원활한 지역에 웅크리고 있다가 다시 북상할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이었다.

순천왜성에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주력군을 배치한 것은 순천왜성이 호남공략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순천왜성은 남해·사천·고성·창원·양산·울산왜성으로 이어지는 왜군 거점 벨트 중 하나였다.

순천왜성의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난중잡록』 정유년 9월 초하루 기사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적이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하여 왜교에 결집하여 성을 쌓고 막사를 지었다."는 내용과, 12월 초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우키타 히데이에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앞으로 축성 완료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아, 1597년 9월부터 11월 말까지 3개월에 걸쳐 축성한 성으로 추정된다.

성의 구조도 궁금하다. 순천왜성은 바다에 면한 천수각이 있는 내성과 본성을 육지 쪽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3겹의 외성으로 축성되었다.

조선인의 눈에 비친 순천 왜성의 모습은 나주 출신 진경문이 쓴 '예교진병일록'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진경문은 정유재란 당시 소의장(昭義將) 임환의 의병부대에서 종사관으로 활약했던 분이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순천부의 남쪽 예교에 퇴거했는데…… 고니시가 위쪽에 넓은 마당을 만들어 놓고 흙을 더해 성을 축성하여 수천의 군인을 수용하였다. 5층 망루를 지어 백토를 칠하고 기와와 벽돌을 덮었으니, 그 모양이 마치 나는 새 날개 같다.…… 동서쪽의 바다와 접하게 하여 선박을 끌어 출입하였다. 그 바깥에 또 한줄기 외성을 쌓아 동서로 바다에 맞닿았고, 그 가운데에 문루를 세우고 흙을 덮었는데, 사면을 거기서 살펴보았다. 성 밖은 목책을 두 겹으로 둘러 설치하고, 그 북쪽 한 면에 한 겹의 목책을 더 세웠다." 조선인의 눈에도 순천 왜성은 2중, 3중의 철옹성이었던 것 같다.

그 철옹성이던 왜성을 1598년 9월부터 10월 초까지 조·명 연합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공격했다. 왜성은 함락되지 않았지만 왜군은 여전히 독안에 갇힌 쥐 신세였다. 육지 쪽도, 바다 쪽도 출구가 막혔다. 그래서 쓴 간책(奸策), 간사한 계책이 뇌물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무장 유정과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간청했다. 진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을 받고 왜의 통신선 1척이 빠져나가는 것을 묵인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통신선이 도착하자, 남해·고성에 주둔 중인 왜장들은 고니시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500여 척의 전선을 순천왜성으로 보낸다. 조·명 연합 수군은 엄청난 규모의 적들이 진격해온다는 보고를 받고, 470척의 전선을 이끌고 노량 앞바다로 향했다. 1598년 11월 19일 시작된 노량해전은 조·명 연합군의 대승으로 끝났지만,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 목숨을 바쳐야 했다.

11월 20일, 왜성에 갇힌 고시니 유키나가는 광양 앞바다에 조·명 연합 수군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철수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것이다. 순천 왜성 전투와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최후의 육·해상 전투였다.

순천왜성 충무사
순천왜성 충무사

검단산성·순천왜성, 현장을 가다

순천왜성에 주둔 중인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공격하기 위해 유정과 권율이 이끈 조·명 연합군이 진을 쳤던 곳이 검단산성(순천시 해룡면 성산리 산84)이다. 검단산성은 여수반도와 순천지역을 연결하는 길목의 검단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138미터, 정상에 오르려면 장복실업 건물 맞은편 입구에서 400여 미터를 걸어 올라야 한다.

검단산성은 정유재란 당시 신성리 왜성에 주둔한 왜군과 대치하기 위해 조·명 연합군이 축조한 성으로 알려졌지만, 1996년 정밀지표조사에 이어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6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에 축성된 백제시대 성으로 확인되었다. 정상에 오르다 보면 성벽과 성문, 우물터의 흔적이 남아있고 여기저기 기왓장을 모은 무더기도 보인다. 다 역사를 품고 있는 흔적이다

정상에 오르면 광양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노량 전투의 현장은 그 너머 어디쯤일게다. 순천왜성과는 지척이다. 검단산성 정상에서 왜성까지는 1.5킬로미터 정도이지만, 검단산성 산자락에서 왜성의 가장 바깥쪽인 외성까지는 500여 미터에 불과하다. 그 500여 미터를 사이에 두고 조·명 연합군과 왜군은 임진왜란 마지막 육전을 벌였던 것이다.

순천왜성 현장 탐방은 당시 명의 종군화가가 왜성 전투의 모습을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을 새긴 표지석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늘은 터만 남아있는데, 왜 정벌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정왜기공도권'은 400여 년 전 왜성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성 밖으로 둘러 판 못인 해자를 따라 산책로로 조성된 길을 따라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흔적이 출입문 터, 문지(門址)다. 만조 때 이 문의 출입로가 다리처럼 보였다고 하여 왜교, 또는 예교(曳橋)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2007년, 복원된 출입문을 보는 순간 필자가 본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출발지 나고야성의 성벽 모습이 떠올랐다. 일본성의 가장 큰 특징은 천수각이 있고, 해자가 깊으며, 성벽의 아랫부분이 넓적한 나팔바지 모습이다. 나팔바지 형태의 모습을 지닌 왜성을 한국에서, 그것도 남도 땅에서 다시 만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정상에 오르니, 왜가 이곳에 성을 쌓고 주둔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육지만이 아닌 바닷길과도 연결된 천혜의 요새였다. 정상 부근 왼쪽 끝자락이 왜성 지휘부 건물인 천수각이 있던 터다. 천수각은 성을 대표하는 권위와 상징의 건물인데, 현재는 건물의 기단만 남아있다. '정왜기공도권'에는 3층 팔작지붕의 천수대가 그려져 있으나, 앞서 언급한 진경문의 '예교진병일록'에는 5층으로 나온다.

순천왜성 정상에서는 육지 쪽의 검단산성도, 광양만도 눈앞이다. 그러나 지금 순천왜성 주변 풍경은 1598년 당시의 풍경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순천왜성 동쪽으로 맞닿아 있던 바다가 없어져 버렸다. 매립되어 율촌지방산업단지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바다는 물론이고, 바다 쪽으로 구축됐던 선착장과 방어시설이 없어져 버렸으니 광양 앞바다를 피로 물들였던 해상전투 장면을 그려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순천왜성 앞바다에 있던 노루섬이라 불린 장도는, 광양 앞바다를 감시하는 왜 수군의 전초 기지였으며 식량 창고였다. 조·명 연합 수군이 1598년 9월 20일 장도를 장악하면서 순천왜성과 경상도 왜 수군은 단절된다. 그러나 오늘 당시의 장도는 찾을 수 없다. 매립되어 율촌산단 맨 오른쪽 끝자락 높이 솟아오른 둔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천왜성 곁 신성리에 이순신을 모신 충무사가 있다. 충무사가 건립된 이야기가 재미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100년 쯤 뒤에 주민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성 전투에서 죽은 왜군들의 혼령이 밤마다 출몰하여 주민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이 이순신 사당을 짓고 위패와 영정을 모시자, 귀신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왜군의 죽은 혼령마저도 이순신을 무서워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