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취업자 절반이 '억지웃음 짓는 감정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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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광주 취업자 절반이 '억지웃음 짓는 감정노동자'
화가 나도 참고… 감정도 숨기고 ||흉악범, 범죄자로 착각하며 살아||피해발생시 직장차원 보호도 취약 ||심리상담 지원 등 안전망 시급해
  • 입력 : 2020. 11.19(목) 17:16
  • 박수진 기자
감정을 숨기고 일해야 하는 직무상황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이 감정을 숨긴 채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감정 노동자' 들이다. 이들의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있지만, 고용의 불안전성과 불이익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일방적으로 참아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었지만, 실제 노동현장에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는 탓이다. 감정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 위협 상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법·제도적 개선이 요구된다.

● 남모르는 고통에 아우성

통계청의 설문조사 등으로 수집한 사례를 보면 감정노동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엿볼 수 있다.

광주지역 콜센터 상담원 A씨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기만 하다. 아침부터 다짜고짜 반말하고 이름부터 따져 묻는 고객들 때문이다.

"9시 딱 돼서 전화 열었는데 삐~ 소리와 함께 가슴이 콩닥거려요. 5초 동안 마음 준비할 시간 주는 데, 나한테 어떤 사람이 연결되지 모르니까요."

A씨는 "상담사들이 왜 점심시간이 있어요?" 이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고 했다. 그러면 A씨는 "우리는 밥도 먹지 말고 일하라는 소린가"라는 생각이 들며 자존감이 낮아진다고 했다.

친절한 목소리와 태도 뿐 아니라, 상담과 동시에 전산을 처리하는 등 다른 업무까지 속도를 빠르게 해야 하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심각하다.

택배기사 B 씨도 "우리는 200% 감정 노동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특히나 갈수록 택배 노동자의 지위가 더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진짜 나는 물건 갖다주는 기계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내가 어디가 문제있는 사람인가, 내가 흉악범인가, 내가 범죄자인가 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고객의 욕설과 비하, 독촉은 물론, 아파트 단지 배달 시 겪는 경비원과 갈등도 많다.

B 씨는 "야 빨리 물건 안 갖고와 하는 고객도 많고 물건을 받아 놓고는 안받았다고 우기는 경우도 많다"며 "일반적으로 택배 노동자는 갑, 을, 병 중에서 병인 것 같다"고 했다.

● 광주만 46만명… 대다수가 고통

감정노동은 주로 고객 응대 업무에서 발생한다. 안내, 돌봄, 외식, 병원, 공공부문 등 분야도 다양하다.

광주의 경우 전체 취업자의 절반 정도인 46만5500명이 감정노동자로 분류된다.

이는 통계청 지역별고용조사 (2019년 하반기)에 기초한 감정노동 직업 종사자수로 분석 결과에 따른 것이다.

광주지역 고객응대 종사자 중 여성이 26만6000명(57%), 남성이 20만9000명(43%) 에 달한다.

이중 광주 취업자 중 감정을 숨겨야 하는 '감정 숨김 노동자'는 전체 취업자의 45.8%인 36만8000명을 차지한다. 감정 노동 고통을 경험했고 그중 대다수가 그냥 참고 견딘 셈이다.

이 가운데 취업자 10명 중 7명을 웃도는 사람들이 '가끔 이상'으로 종종 감정을 숨기고 일하는 상황을 경험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대부분 이상'을 응답한 감정숨김 노동자의 경우, 광주시가 45.8%로, 전국 (40%)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다.

지난 1년간 업무과정에서 '업무 외 요청 및 억지 주장, 무리한 요구 등 업무 방해', '말꼬리 잡고 늘어지거나 인격 무시하는 언행', '욕설 폭언' 에 대한 경험이 가끔 78.8%, 자주 77.8%, 매우 자주 64.6%에 달했다.

문제는 피해 상황 발생시 직장 차원의 보호가 취약하다는 것이다.

악성 고객으로부터 피해 발생 시 직장의 보호가 있냐는 질문에 '마음의 상처를 공감, 위로해준다' (1.7점), '피해 발생이 예상되면 사전예방 조치 해준다' (1.6점), '피해가 발생하면 업무에서 잠시 벗어나게 하는 등 보호조치를 해준다' (1.6점) 3가지 항목 모두 2점 (가끔 있음)을 밑돌았다.

감정노동자들은 질병과 우울감 등 건강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1년간 현재 업무로 신체적, 정신적 질병 경험이 있다는 응답은 41%에 달했다. 이어 신체적 질병 경험률은 36.5%, 정신적 질병 경험률은 12.2%였다.

●심리상담 지원·노동환경 안전망 마련

감정노동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1차적으로 취해져야 할 지원은 심리 상담과 치유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감정 소진을 겪고, 이를 제때 해소, 치유하지 못할 경우 신체적, 정신적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으로 인한 고통은 이들을 고용한 기업에서 다루는 게 좋다.

합리적인 임금 산정과 고용안정, 유가 보장, 사회 보험을 비롯한 각종 보험 제공 등 노동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안전망도 마련돼야 한다.

악성 민원인에 대한 법적 대응을 강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심리상담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악성 고객의 행위에 대해 법적 처벌, 감정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한 캠페인도 필요하다.

박수진 기자 sujin.park@jnilbo.com